몇 장의 사진과 함께 독자의 제보를 받았다. 사진 속에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왕년의 자동차'들이 수두룩 먼지가 쌓인 채 주차장 한편에 방치돼 있었다. 누비라와 레조 '1호차'를 비롯해 트랙스의 전신인 T2X, 라세티 WTCC 등 대우자동차에서 시작돼 한국GM으로 이어진 수십년의 역사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쓸쓸히 마지막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차량 상태는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심각했다. 두터운 먼지는 기본이고, 차체 곳곳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부서지고 떨어진 차체는 비닐과 테이프에 의존해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오래된 거미줄이 바람에 흩날렸다.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무엇보다 철저히 관리해야 할 역사적 자산이 왜 이렇게 볼품없이 버려져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모터그래프 취재팀이 사진 속 군산대학교 새만금캠퍼스를 찾았다.

# 거미줄 투성이 빛바랜 콘셉트카

대학에 진입하자 독특한 외형의 차량들이 바로 눈에 띈다. 주차장에 10대, 건물 앞 광장에 6대의 차가 각각 서있다. 얼핏 봐도 관리 상태는 좋지 않다.

진입로 입구에 주차된 3종의 콘셉트카는 유독 심각하다. ‘조이스터’, ‘타쿠마’, ‘만티카’ 콘셉트다. 외환위기가 발발하기 직전인 1997년 공개된 콘셉트카로, 대우자동차 시절 나온 작품들이다.

조이스터는 하드톱이 분리되어 있고, 그 빈 자리에는 거미줄이 쳐졌다. 대우 엠블럼이 선명한 중앙 클러스터와 대시보드에는 뽀얗게 먼지가 앉았다. 도장 곳곳이 부풀어 올랐고, 밑 바닥과 휠 하우스 안쪽에는 녹이 가득하다.

바로 옆 타쿠마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피닌파리나가 디자인을 주도한 ‘레조’의 원형이지만, 도장 곳곳이 손상되어 있다. 사이드미러는 부서졌고, 곰팡이가 핀 실내는 안타까움을 더한다.

걸 윙 도어를 탑재한 만티카도 도어 한쪽은 파손돼 청테이프로 감겨있다. 그나마 멀쩡한 반대편 도어는 작동하지 않는다. 타쿠마처럼 실내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다.

대우 바다(VADA) 콘셉트
대우 바다(VADA) 콘셉트

대우차 최후 콘셉트카였던 ‘바다’는 앞 유리가 깨져 안이 훤히 들어다 보인다. 새하얀 외관은 흙먼지로 얼룩덜룩하고, 엣지있던 사이드미러는 온데간데 없다.

군산공장에서 처음 생산된 ‘누비라’ 1호차는 그럭저럭 상태가 양호하다. 보닛에 쓰여진 대우차 임직원의 희미한 서명만큼 과거를 잊어버린 듯하다.

# ‘GM 이후 역사’도 방치됐다

누비라 1호차 옆에는 GM대우 출범 후 첫 양산차인 ‘레조’ 1호차가 서있다. 보닛에는 GM대우 초대 사장인 닉 라일리(GM 전 수석부사장) 등 당시 임직원 서명이 빼곡하지만, 방치되어 있기는 매한가지다. 대우차가 GM에 인수된 이후 나온 역사까지 버려진 셈이다.

GM대우 첫 SUV로 국내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윈스톰(쉐보레 캡티바)의 쇼카 ‘S3X’는 타이어 바람이 빠진 채 주저앉아 있다. 앞 범퍼와 테일램프는 깨져있고, 휠에도 흠집이 가득했다.

‘라세티 WTCC’와 트랙스의 전신인 ‘T2X’ 방치는 충격적이다. 라세티는 당시 월드투어링카 챔피언십(WTCC)을 휘잡은 ‘전설’이고, T2X를 양산화한 쉐보레 트랙스는 한국GM의 수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어서 더 그렇다.

이외 GM대우 당시 출시가 검토되던 스포츠카 ‘스피드스터’와 콘셉트카 ‘스코프’ 등은 그나마 외관이 잘 보존된 모습이다.

# 기증만 하면 끝?…GM도 대학도 나몰라라

지역지 군산뉴스에 따르면, 해당 차량은 한국GM 군산공장 홍보관에 전시됐던 작품들이다. 공장 폐쇄 후 고철로 매각될 계획이었지만, 한국GM 군산대외협력단장의 요청으로 인해 작년 10월 군산대학교에 전량 기증됐다. 

하지만 이후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학 내 한 관계자는 “새만금캠퍼스 내에 해당 차량들이 어떻게 전달됐는지 알 수 없다”며 “최근 현대차로부터 전기차를 기증받은 사실은 있지만 GM에서 기증받은 차량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GM도 “군산공장 폐쇄 후 협의를 거쳐 자산(차량)이 학교 측으로 이전됐다는 내용 외에는 상세한 내막을 알기 어렵다”며 “당시 관련자들이 대부분 퇴사한 탓에 이 일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직원도 없다”고 말했다.

군산은 한때 한국GM의 수출 전진기지였다. 누적 300만대를 기록한 라세티와 크루즈는 국산차 수출 실적을 견인했고, 이 황금기 군산 지역경제의 30%를 책임졌다. 그러나 과거의 빛나던 영광은 이제 온데간데 없다. 언제 고철로 처분되지 않을지 하루하루가 걱정이다.

‘역사를 잊은 이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자신의 역사를 방치하고 잊은 이들이 과연 어떤 미래를 맞을 수 있을까.  

과거 한국GM 군산공장이었던 곳은 현대차의 1차 협력사인 명신이 인수했다.
과거 한국GM 군산공장이었던 곳은 현대차의 1차 협력사인 명신이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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