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대 기대작이었던 기아 EV9에 대한 소비자 반응이 차갑게 식었다. 사전계약 8일 만에 1만대를 돌파하는 등 초기 인기몰이엔 성공하기도 했지만, 실제 판매로 이어지지 않았다. 올해 11월까지 누적 판매량은 5364대에 불과하다. 수출을 포함했다지만 올해 목표로 잡았던 '5만대'가 무색할 정도의 처참한 성적표다.

기아 EV9
기아 EV9

가장 큰 이유는 가격이다. 일반적으로 전기차는 배터리 가격 등을 이유로 동급 내연기관보다 비싸다. 하지만 EV9의 몸값은 최대 1억원을 넘길 정도로 생각보다 더 높았다. 전기차 구매 요인 중에는 '경제성'도 있는데, 비싼 차값은 경제적이지 않다. 결국 소비자들은 지갑을 꾹 닫았다.

그런데 최근 EV9 대란이 펼쳐졌다. 기아가 최후의 수단으로 최대 2500만원에 달하는 파격 프로모션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대상에 오른 재고차량은 눈 깜짝할 새 팔려나갔다. 전기차 동호회에는 '대란에 탑승했다'라는 인증글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고, 초기 구매자들은 '제값 주고 산 소비자를 바보로 만들었다'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안 팔리던 차가 할인하니 잘 팔린다는 것은 '차는 좋은데 가격이 비싸다'는 뜻으로 보여진다. 차가 별로라면 제아무리 저렴하더라도 팔리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EV9은 어떤 차인지 직접 시승하며 9가지 특징을 살펴봤다. 어스 트림 6인승 사륜구동 모델로, 출고가는 약 8800만원이다.

# 1. 반박불가 '디자인의 기아'

기아 EV9
기아 EV9

이국적인 외모가 눈길을 끈다. 전기차를 위한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 언어가 적용됐다. 호랑이코 그릴을 응용한 디지털 타이거 페이스와 큐브형 LED, 스타맵 콤비네이션 램프 등이 어우러져 미래 지향적 느낌을 준다. 변종(?) 같은 EV6를 제외하면, 향후 나올 EV 시리즈(EV4·EV5)와 통일성도 갖췄다.

플래그십 SUV인 만큼 덩치도 산만하다. 전장과 전폭, 전고는 각각 5010x1980x1755mm, 휠베이스는 3100mm에 달한다. 쏘렌토는 물론, 현대 팰리세이드보다 크다. 각진 차체 덕분에 실제 크기보다 더 커 보이는 효과도 있다.

기아 EV9 1열
기아 EV9 1열

독특한 외관만큼 실내도 새롭다. 로고를 가린다면 단번에 기아임을 알아차리기 어렵겠다. 그만큼 신경 써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두 개의 12.3인치 화면을 연결한 파노라믹 와이드 디스플레이가 탑재됐는데, 실내가 넓어서인지 그다지 크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플래그십 모델인 만큼, 나중에는 제네시스 등에 선보인 27인치 통합형 디스플레이를 기대해 본다.

눈길을 끄는 건 인포테인먼트 화면 아래쪽에 위치한 히든 타입 터치 버튼이다. '샤이 테크'가 적용됐는데, 시동을 끈 상태에는 보이지 않다가 전원이 들어오면 빛을 내며 버튼이 활성화된다. 보기에도 예쁜데 라디오/공조를 필요할 때 조작하는 실용적인 기능도 갖췄다.

다만, 소재는 많이 아쉽다. 기아는 "모던하고 간결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하이그로시 및 크롬 소재를 최소화 했다"고 설명했지만, 흔히 말하는 '고급감'과는 거리가 멀다. 몸값을 생각하면 더 좋은 퀄리티를 보여줬어야 한다. 또 1열 시트 헤드레스트는 사무실 의자가 떠오르는 망사 재질이다. 2·3열은 제대로 된 가죽으로 마감했는데 왜 이렇게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 2. 드넓은 수납공간, 카니발 안 부러워

기아 EV9 2열 콘솔 박스
기아 EV9 2열 콘솔 박스

수납공간은 광활하다. 평평한 바닥과 긴 휠베이스 등 E-GMP의 특성을 살렸다. 단순히 넓기만 한 게 아니라 활용도도 높다. 컵홀더와 사물함을 겸용하는 센터 콘솔, 그 아래 축구공도 들어갈 크기의 추가 공간, 서랍처럼 열리는 글로브박스, 수납함과 트레이를 동시에 쓸 수 있는 2열 센터 콘솔 등 실내 곳곳에 다양한 사이즈를 마련했다.

'프렁크(프론트+트렁크)'도 마련됐다. 간단한 세차 용품이나 충전 용품, 냄새가 나는 물건 등을 보관할 때 유용하다. 전자식 후드 래치를 적용해 손쉽게 열 수 있도록 만든 점 또한 칭찬 요소다. 프렁크를 열 때마다 후드 래치를 당겨야 하는 불편을 덜었다.

# 3. 풍부한 2열 옵션, 색다른 스위블 시트

기아 EV9 트렁크에 위치한 V2L 및 2·3열 폴딩 레버
기아 EV9 트렁크에 위치한 V2L 및 2·3열 폴딩 레버

웬만한 소비자 선호 사양은 다 갖췄다. LED 램프,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1열 열선·통풍시트, 디지털 키2, 메리디안 프리미엄 오디오 등 없는걸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다. E-GMP 차량에서만 볼 수 있는 V2L 기능도 챙겼다. 캠핑이나 차박을 즐기는 이들에게 여러모로 유용하다.

2열은 스위블 시트가 돋보인다. 180도 회전해 3열과 마주볼 수 있고, 3열을 접고 트렁크를 열어 휴식을 즐기기에도 좋다. 또 측면으로 90도 회전해 유아용 카시트를 장착하기도 편하다. 하지만 옵션 선택이 제한적이다. 기아는 스위블 및 릴렉션 시트 옵션을 사륜구동 모델에만 제공하고 있다. 후륜구동 모델은 평범한 6인승 시트만 선택할 수 있다.

# 4. 현재로서는 유일한 3열 전기 SUV

기아 EV9 3열
기아 EV9 3열

3열의 존재는 EV9의 핵심 요소다. 현재 국내 판매되는 전기 SUV 중 유일하게 3열 시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볼보 EX90과 캐딜락 비스틱 등이 떠오르지만, 당장 국내에서 구입할 수 없는 차량들이다.

일단 거주성은 좋다. 컵홀더는 물론 USB C타입 충전 포트까지 갖췄다. 측면 유리가 넓어 시야도 쾌적하다. 다만 착좌감이 썩 편하진 않다. 방석이 좁고 낮아 성인이라면 반듯한 자세로 앉기 어렵다. 잦은 폴딩을 고려해서인지 등받이가 평평해 몸이 좌우로 쉽게 쏠린다.

장단은 있지만 분명 3열의 존재는 환영할 만하다. 어린아이들이나 한 번에 많은 인원을 수송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안 쓰는 것과 없어서 못 쓰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 5. 좋은듯 나쁜듯 오묘한 승차감

기아 EV9
기아 EV9

승차감은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우선 시내에선 만족도가 높았다. 특히 방지턱을 넘는 느낌이 무척 좋은데, 아주 부드럽게 넘어가면서도 불필요한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브레이크 감각도 좋다. 회생제동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고 초반 울컥임도 없다. 방음 대책도 상당해 정숙성도 돋보인다. 스티어링 휠은 반박자 늦게 따라오며 여유로운 세팅이다.

아쉬운 건 고속 주행이다. 자잘한 충격이 실내로 꽤 들어오는데, 마치 휠베이스가 짧은 차를 타는 듯한 움직임이다. 도로 이음매 등 어느 정도 충격에 대한 대응 능력은 좋은 반면, 노면 상태가 좋지 못한 도로를 달릴 땐 많은 충격을 허용한다. 공기압이나 휠 사이즈 등에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고급 SUV에서 보여줄 승차감은 아니다.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 6. 레벨2 주행보조는 만족…레벨3는 언제쯤?

기아 EV9 스티어링 휠 로고 조명

현대차그룹의 주행보조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EV9에는 레벨2 수준의 자율주행 기능 'HDA 2'가 적용됐는데, 앞차와 간격 유지는 물론 차로 유지 능력도 수준급이다. 특히 국내 도로 데이터를 많이 가지고 있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많이 본다. 내비게이션과 연동해 속도를 조절하고, 안전 구간과 곡선로 등을 미리 파악해 대처하는 능력도 놀랍다.

하지만 레벨3 자율주행 적용 시점은 여전히 미지수다. 레벨3는 차간 및 차로 유지에 이어 운전자가 합법적으로 손을 떼고 운행할 수 있는 단계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은 레벨3 제한속도를 시속 60km에서 80km로 올리면서 생각보다 많은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기아는 EV9을 공개하며 올 하반기 라이다(LiDAR) 기반의 레벨3 자율주행 기능 'HDP(Highway Driving Pilot)'를 선보인다고 밝혔다. 옵션 가격(750만원)까지 밝히면서 계약을 받았지만,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출시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아는 현재 HDP 예약을 중단한 상태다.

# 7. 여유만만 주행거리, 600km도 가능?

약 50km를 달린 결과 배터리 잔량은 92%, 남은 주행거리는 548km다.
약 50km를 달린 결과 배터리 잔량은 92%, 남은 주행거리는 548km다.

배터리 효율과 주행거리 모두 만족도가 높다. 대형차의 연료탱크가 큰 것처럼 EV9의 배터리 용량도 99.8kWh에 달한다. 덕분에 2.5톤이 넘는 거구임에도 인증거리 454km를 받았다. 참고로 시승차는 사륜구동(AWD), 6인승, 21인치 휠 모델로, 에너지 효율은 3.9km/kWh다.

배터리를 100% 충전하니 주행가능거리 596km를 나타낸다. 막히는 시내와 고속도로를 고루 달렸고, 일교차가 큰 탓에 냉방과 난방을 적절히 사용했다. 최종 배터리 효율은 6.3km/kWh다. 굳이 연비 운전을 하지 않더라도 500km는 가볍게 넘길 것으로 보인다. 배터리를 아낀다는 각오라면 600km도 가능할 법하다.

# 8. 소프트웨어 중심의 구독형 서비스

기아 EV9
기아 EV9

많은 현대인들이 월 요금제 상품을 이용하고 있지만, 차량과 관련된 구독형 서비스만큼은 소비자 반발이 크다. 이유는 하드웨어 기능을 소프트웨어로 막아놨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뒷바퀴 조향각이 10도까지 꺾이는 차량을 구매했는데 4.5도로 제한해놓고 활성화를 원하면 추가로 돈을 내라는 식이다. 이미 하드웨어 비용이 포함된 차량 가격을 지불했는데 추가 비용을 내라는 마케팅은 소비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부정적 여론을 인식한 듯, 기아는 편의성 위주 소프트웨어 구독만을 시행하고 있다. 원격 주차·출차 및 주차 보조를 지원하는 '원격 스마트 주차 보조 2', 프론트 그릴을 5가지 패턴으로 꾸밀 수 있는 '라이팅 패턴', 영상 및 고음질 음원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스트리밍 플러스' 등이다.

기아 측은 "기본 편의·안전 사양을 구독 상품화해 소비자에게 불편함을 주지는 않겠다"라는 입장이다. 이같은 방침이 얼마나 오래갈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 9. 역시나 비싼 가격이 걸리네

기아 EV9
기아 EV9

시작 가격이 7337만원(친환경차 세제혜택 적용 기준)에 달하는 비싼 자동차다. 최상위 GT라인 사륜구동은 8397만원에 달한다. 전기차 보조금 대상이지만 차량 가격 5700만원을 초과해 절반만 수령한다. 트림에 따라 국고 311~330만원, 지방비 82~87만원으로 총 393~417만원을 받는다(서울시 기준).

더군다나 선택할 수 있는 옵션도 많다. GT라인에 6인승 릴렉션 시트(198만원), 스타일 패키지(69만원), 메리디안 프리미엄 사운드(119만원), 듀얼 선루프(119만원), 하이테크 패키지 (디지털 사이드 미러 포함, 198만원) 등을 추가한 풀옵션 가격은 9208만원이다. 보조금을 수령해도 8815만원인데, 이는 카니발 2대를 사고도 남는 액수다. 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수입 프리미엄 SUV를 노려볼 수도 있는 가격대다.

# 결론. 차는 좋은데, 선뜻 사기엔 글쎄?

기아 EV9
기아 EV9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보였지만, 충분히 매력 있는 자동차다. 특히 EV9의 경쟁력은 '대형 3열 전기 SUV'라는 타이틀에서 나온다. 아직까지는 경쟁 모델이 없는 블루오션이다. 여기에 넉넉한 실내 공간과 풍부한 옵션, 여유로운 실 주행거리도 큰 장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가격이 발목을 붙잡는다. 1억원에 가까운 돈을 지불하면서 얻는 이점이 부족하다.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라던가 '고급스런 소재감'이라던가… '그돈이면'을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다. 조금 더 저렴했다면 몇 배는 더 팔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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