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n 칼럼] 나라의 상태가 투영되는 자동차 디자인
  • 김준선
  • 좋아요 0
  • 승인 2019.10.07 13:34
[Erin 칼럼] 나라의 상태가 투영되는 자동차 디자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의 이직은 점점 더 글로벌화 되고 있습니다. 국가별로 자동차회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외국을 넘나들 수 밖에 없지요. 독일차를 한국인이 디자인하고 한국차를 독일인이 디자인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자동차 디자인에 지역별 특징이 옅어졌지요.

그러나 여전히 자동차 디자인에는 제조사,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그 나라의 현재 상태가 강하게 투영됩니다. 차별포인트가 점점 줄어가는 가운데, 제조사마다 디자인으로 남과 다른 개성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에 개성을 녹여 내는 바로 그 과정에서, 의도했든 아니든 디자이너와 회사, 그리고 해당 제조사가 속한 국가의 지금 모습이 투영되는 것입니다.

미국차의 디자인은 그것이 매우 적나라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소련과의 대결로 우주개발열풍이 한참이었던 1950년대 미국차 디자인은 아주 좋은 사례지요. 우주선 발화구처럼 생긴 테일 핀을 비롯, 하늘을 유영할 듯한 자동차 스타일링은 당시 미국의 풍요로움과 우주를 향한 욕망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아무 쓸모 없지만 멋만 있는 과분한 디자인이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만만했던 이들의 디자인은 오일쇼크가 터지며 급격한 변화를 겪습니다. 연비와 유지비가 중요해진 시대에 치장 가득한 디자인은 제거대상이죠. 미국에 풍요와 낭비의 가치가 끝나고 합리와 효율의 시대가 찾아왔지요. 이런 상황이 그들의 자동차 디자인에 표현된 것입니다.

경기침체 속에서 가장들의 근무시간이 줄어들자 경제적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합리적인 패밀리카 수요가 생겼습니다. 크라이슬러 캐러밴은 그렇게 개발되었습니다. 시대적 배경이 미니밴을 탄생하게 한 것이죠.

한동안 유럽/일본차 디자인에 비해 엉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미국차 디자인은 최근에 다시 꽃 피는것 같습니다. 벤츠의 과도한 패밀리룩 혹은 BMW의 낯선 변화 때문에 유럽차 디자인이 주춤하는 사이, 상대적 호감을 끌고 있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차 특유의 시원시원한 스타일링에, 유럽 아시아 디자이너들을 끌어들인 감각적이고 섬세한 터치까지 더해 다른 어떤 나라 차에서도 보지 못했던 과감함과 세심함을 모두 챙기고 있지요. 다시 한 번 America First를 외치고 있는 요즘 미국의 기세를 보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독일차 입니다.

전후 독일차 디자인은 주변국 차들에 비해 다소 초라한 편이었습니다. 언제나 화려하고 관능적인 이탈리아 브랜드 디자인이나, 개성이 과도할 정도로 넘치는 프랑스 디자인에 비해, 50~60년대 독일차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소심하고 조용합니다. 뾰족한 주장을 하기 보다 모난 곳을 다듬어가는 디자인입니다. 그들이 일으켰던 악명 높은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때여서 일까요? 온 국민의 자숙모드가 해당 국가 브랜드의 자동차 스타일링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에도 독일차 디자인은 화려함과 개성보다 정갈함과 정리정돈으로 설명되어 왔습니다.

그랬던 독일차 디자인의 기조가 바뀐 건 1990년대 들어서입니다. 90년대는 자동차 회사들에게 있어서 세계적인 인수합병으로 국가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발점이었습니다. 디자이너가 한 회사에 머물지 않고 국가를 넘나들며 이직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죠. 그러한 기조가 지금까지 확대되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유명 대학은 크게 영국과 미국으로 나뉘어 있는데요, 당시 독일회사에는 미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미국 업체에서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다수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BMW 디자인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크리스토퍼 애드워드 뱅글도 그런 디자이너 중 한 명 이었죠.

전후 줄곧 얌전한 스타일을 유지해 오던 BMW의 디자인에 크리스뱅글의 모험적 손길이 더해졌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지켜오던 독일식 황금비례에 미국식 실험정신이 더해졌지요. 이후 펼쳐진 BMW의 극적인 디자인 르네상스 시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2세대 메르세데스-벤츠 SLK 디자인당시 스케치

이에 따라 라이벌인 벤츠와 아우디의 디자인도 덩달아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딱딱한 디자인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벤츠 디자인에도 90년대 말부터 자유곡선이 휘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아우디는 와다 사토시라는 일본인 디자이너를 주축으로 그들만의 싱글프레임 그릴을 선보이게 되죠.

마지막으로 일본차 디자인입니다.

1955년식 토요타 1세대 크라운

일본도 출발시기 배경은 독일차와 비슷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뒤, 국가재건을 위해 자동차산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다만 독일만큼의 기술력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빠른 기술 및 디자인습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베끼는 것이었습니다. 50년대 일본 자동차 기술자들은 종이와 펜 반입도 금지된 해외 공장탐방에서 생산시설 장비를 눈으로 보고 와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기술력으로나 디자인 감각으로나 아직 수준은 떨어지는데 서둘러 베끼다 보니 초창기 일본차의 디자인은 어설프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차와 닮기는 했는데 비율과 조형미가 엉망이죠.

1972년식 혼다 1세대 시빅

일본차 대접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오일쇼크 시기부터입니다. 가볍고 연비 좋은 일본차가 주목 받으면서 만년 패스트팔로워에서 처음으로 주인공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급성장과 더불어 미국의 경계심도 얻었지요. 80년대 들어 일본이 고도경제성장으로 미국시장을 잠식해가자 일본에 대한 견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미국의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이 일본차를 부수는 등 항의시위가 매일 이어졌습니다. 놀란 일본은 미국에 공장을 세우고 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겠노라 약속하며 그들의 분노 앞에 바짝 엎드렸습니다. 자본과 기술이 충분했지만,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빨을 숨겨야 했던 것이죠. 이렇게 스스로 가진 것보다 참고 자제해야 했던 일본의 상황은 일본차 디자인의 황금기를 불러왔습니다.

1989년식 닛산 4세대 페어레이디 Z

쥐어짜낸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자제한 디자인. 1980~90년대 초반 일본차 디자인이 Japanese Classic이라 불리며 지금까지 거론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차를 보면 더 화려한 멋을 낼 수 있는데 90% 수준에서 참은 듯한 깊이 있는 멋스러움이 느껴집니다.

1991년식 미츠비시 2세대 파제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털어낸 게 아니라, 약간의 여유를 두고 그만큼의 여분을 완성도 높이는데 할애한 느낌이죠. 모든 비례감이 뛰어나서 조형미가 무척 안정적인데, 그렇다고 심심하거나 뻔하지는 않은 아주 황홀한 디자인을 갖췄습니다. 부자가 절약하는 느낌이랄까요. 일본의 경제력이 넘쳐났는데, 앞서 말한 국제정세 때문에 스스로 2등에 머물렀던 그들의 현황이 디자인에 투영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세도 경제력도 90년대 초의 버블경기와 함께 터져버렸습니다. 갈 곳 잃은 일본의 상황은 당시 일본차 디자인에도 드러납니다. 회사의 얼굴과도 같은 최고급 브랜드 대표차종인데도 쌩뚱맞은 철판 한가운데 뚫어놓은 테일램프가 디자인 방향성 상실을 대변해주고 있지요. 전세계인을 매료시켰던 자동차들이 모델체인지 때마다 차례차례 망가져 갔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괜찮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본차의 라이벌은 모두 일본차보다 우위에 있는 브랜드였으니까요.

2010년대가 되자 그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한국차가 치고 올라옵니다. 디자인으로는 한국차에 추월당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중국차도 심상치 않습니다. 일본차 처음으로 위 뿐 아니라 아래도 신경 써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자동차성능이 상향평준화 되는 가운데 첫인상이 더욱 더 중요해 집니다. 현대차가 멋진 YF쏘나타로 캠리를 위협합니다. 독일차 브랜드는 여전히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미국차 디자인도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완성도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 일본차는 당황스럽습니다. 디자인방향성을 급하게 바꿉니다. 박스형 경차만 그려본 디자이너들을 억지로 쥐어 짭니다. 그들이 가장 잘 했던 황금비율과 절제된 형상미는 이제 온데간데 없습니다. 살짝 물을 묻히고 싶었는데 컵을 엎질러버린 격입니다. 갈급하고 당황한 모습이 디자인에 그대로 투영됩니다.

회사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일본이라는 국가단위로 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그들이 원했던 유럽만큼의 지위를 얻지 되지 못했는데, 나라를 발전시킬 인재는 갈 수록 줄어들고, 주변국들의 성장은 심상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자꾸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디자인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디자인이란 그 와중에도 익숙하게 정리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최근의 렉서스를 보면 엎지른 물이라도 정리해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2010년대 초반 급격한 디자인방향성 변화로 디자인을 마구 휘둘러댔지만, 그 중 결과가 괜찮았던 것들을 끌어 모아 다시 정리에 정리를 거듭해 나가는 모양새 입니다. 처음에는 ‘어쩌려고 저러나’ 싶었던 디자인이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감하게 시도해볼 수 있는 자본력과 맷집 있는 브랜드만이 해볼 수 있는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해당 시대 회사와 나라의 상황이 디자인에 어떻게 투영되는지 되돌아봤습니다. 디자인이란 객관화와 도식화 하기 힘든 개념이기에 다소 추상적인 내용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느껴보실 수 있었다면 다행입니다. 칼럼을 마무리하며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