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n 칼럼] 쌍용차를 살릴 마지막 치트키, '디자인'
  • 김준선
  • 좋아요 0
  • 승인 2019.07.15 09:22
[Erin 칼럼] 쌍용차를 살릴 마지막 치트키, '디자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과거의 쌍용차를 기억합니다. 우리나라 자동차가 아직 ‘품격’이나 ‘고급’과는 거리가 멀었던 90년대 초반부터 쌍용차에는 그들만의 견고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 속에는 분명 럭셔리하고 전문적인 느낌이 스며들어 있었지요. 메르세데스-벤츠의 주요부품을 사용했고, 그것을 홍보에 적극 활용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산업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회사는 아니어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 혹은 자동차를 잘 아는 전문가들이 타는 브랜드 이미지. 쌍용차의 이런 이미지에는 그들만의 선진적인 디자인이 크게 기여했습니다.

갤로퍼처럼 각지고 투박한 SUV시장에 유선형의 고급세단 같은 디자인으로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무쏘,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로 과거와 미래를 훌륭하게 버무려 한국 자동차 디자인계에 한 획을 그은 뉴 코란도, 모두 뛰어난 디자인으로 기억되는 모델입니다. 하다못해 승합차였던 이스타나까지 실내외 통틀어 허투루 디자인된 경우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모험적 시도뿐 아니라 훌륭한 조형적 완성도까지 갖춘 정말이지 놀라운 디자인의 모델들이 포진해 있었지요. 쌍용차란 그런 회사였습니다.

이미 추억이 되어 수 없이 되풀이된 쌍용차 왕년의 이야기, 그 이후에 불어 닥친 디자인 암흑기와 상하이차 먹튀로 인한 법정관리 사태까지. 쌍용이 겪어왔던 최근 십여 년 간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한 티볼리 이후 다시 정상화의 길로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는 현황을 부정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쌍용차가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최근의 쌍용차 분위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티볼리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쌍용은 G4렉스턴과 렉스턴 스포츠, 최근의 신형 코란도까지 신차출시 공세를 이어가며 승승장구 하고 있는 중입니다. 시장 또한 SUV 트렌드가 지속되는 중이라 순풍까지 불고 있는 상황. 그러나 조금만 들춰보면 여전히 쌍용차의 미래는 불안요소로 가득합니다.

성공적 자동차의 제품력은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됩니다. 모두를 열거할 순 없지만 주로 파워트레인과 내구성, 디자인과 실내 패키징, 연비와 편의장비 등이 거론됩니다. 이것들을 모두 두루 갖추어 세상에 나온다 해도 최종적 성공을 위해서는 시대적 요인 또한 받쳐줘야 하지요. 역으로 쌍용차는 제품력에 구멍이 많지만, 시대적 요인이 잘 맞아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최근 몇 년간의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파워트레인. 보통의 자동차회사들 사이에서 이미 5~6년 전 출시열풍이 불었던 다운사이징 가솔린터보 엔진을 쌍용차는 이제서야 처음 선보였습니다. 티볼리 부분변경 모델에 적용되었죠. 지금 전세계적 출시열풍은 다운사이징이 아닌 전기차입니다. 그러나 전기차에 대해 쌍용차에서 들려오는 구체적인 소식은 여전히 없습니다. 신형 코란도 기반 EV를 개발 중이라는 여러 매체 보도내용이 만약 사실이라 해도 가솔린 터보엔진처럼 전세계적 트렌드에 너무 뒤늦게, 그리고 힘겹게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디자인이나 내구성, 혹은 실내 패키징에서 쌍용이 우위를 점하는 부분도 없습니다. 굳이 이들 제품을 구매해야 할 만큼 쌍용만의 강력한 분야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계시장으로 눈을 넓히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지금의 쌍용차는 그저 그런 기술력과 이보다 더 그저 그런 이미지로 애매하게 포지셔닝 되어있습니다. ‘SUV 전문 브랜드’라는 타이틀은 랜드로버나 지프처럼 독보적인 험로주파능력과 프레임기술, 혹은 전세계적인 팬층을 확보했을 때 붙일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차종을 개발할 여력이 없어 SUV만 남은 브랜드에 붙이는 수식어가 아닙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시한 소형 SUV도, 남들이 없는 SUT(Sport Utility Truck)를 보유한 것도 어디까지나 한국 내수시장 이야기일 뿐, 이 정도 특징으로는 시대적 순풍 없이 앞날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내수시장도 과거 쌍용차 최대 고객층이었던 30대의 자동차 구매력이 갈 수록 떨어지고 있는 상황. 굳이 여러 사정을 고려하지 않아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파워트레인 같은 핵심적 기술력은 자동차 모델체인지 한 세대 주기 정도의 짧은 기간에 바꿀 수 없습니다. 모두가 추구하는 첨단 편의장비나 내구성 등에서도 쌍용차만의 차별점을 뽐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뛰어난 제품력을 갖추기 위한 여러 요소 중 개발 투입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고, 한 세대의 자동차 모델체인지 주기 시간이면 적용 가능하며, 외부의 도움도 받을 수 있으면서, 무엇보다 쌍용차만의 개성을 뽐내기에 가장 수월한 방법. 그것은 디자인입니다.

지금처럼 시대의 유행을 겨우 버무린 수준의 어설픈 스타일링을 과감하게 버리고, 쌍용차만의 특징으로 내세울 수 있는 강력한 디자인정책을 펴야 합니다. 단순히 그릴 디자인 통일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기괴한 카이런과 로디우스 등의 실패사례 때문에 보수적 디자인으로 회귀한 상황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전세계 자동차회사들이 너도나도 기괴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시대. 기존 자동차디자인 규칙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못생긴 디자인 순위권에 뽑혀서 조롱 당한 양산차를 만들어냈던 쌍용차의 이력은 지금 이 시대에 거꾸로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당시의 과감한 용기는 다시 한 번 가지되, 조금만 더 최종 마무리를 잘 정리할 수 있다면 헤리티지도 챙기면서 나름 회자되는 스타일링을 뽑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건 과거에 (멋이 있었든 없었든) 개성 있는 자동차를 가져본 적 있었던 회사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세계 사람들 뇌리에 어떻게든 박혀 있긴 하니까요.

그것을 꼭 사내 디자인팀에서 할 필요도 없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요즘 쌍용차 사내 디자인팀의 결과물을 보면 실패하지 않기 위해 잔뜩 경직된 군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긴장한 탓에 자동차디자인이 딱딱하고 굳어있지요. 유려한 디자인에 필요한 유희와 여유, 넘치는 감성이 전혀 없습니다.

쌍용차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려하고 뛰어난 디자인 라인업을 갖췄던 전력이 있습니다. 타사와는 한 차원 다른 쌍용차만의 무기가 있었던 회사입니다. 그 무기의 절반에 해당했던 디자인 특화정책은 현재 앞날이 위태로워 보이는 쌍용차에 치트키가 되어줄 것입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