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n 칼럼] 스타 디자이너의 위험성
  • 김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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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08 14:27
[Erin 칼럼] 스타 디자이너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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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디자인은 주관적 영역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숫자로 나타내기 힘든 분야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새로운 차를 디자인할 때 구형보다 얼마나 멋있어 졌는지, 모양을 어떻게 바꾸면 몇 대나 더 팔리는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더 좋아하는지, 계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와이드하고 날렵하게 디자인해도 멋 없는 차가 있고, 두껍고 딱딱한데도 멋있는 차가 있습니다. 예리한 예술적 감각 영역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적용 가능한 멋의 조건이란 사실상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디자인팀은 기어코 멋진 차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답도 기준도 하다못해 나침반도 없는 암흑 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죠.

한편으로 자동차는 전통적 제조업 중의 제조업 입니다. 대당 개발비만 수천 억이 들어가고 대량의 회사들이 관계된 국가산업이지요. 자동차회사가 아무리 거대하고 돈이 많아도 신차 한두 대가 망하면 관계사들까지 그룹 전체가 휘청거립니다. 그만큼 신차의 개발은 신중에 신중을 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회사뿐 아니라 거대 산업 전체를 지속적으로 먹여 살리기 위해 신차가 필요한데, 이러한 신차의 첫 인상과 향후 판매 추이를 좌지우지하는 게 디자인인 것입니다. 신차의 중요도는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그 중 디자인의 중요도는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그만큼 중요하고 막중한 책임을 지닌 신차의 디자인을 암흑 속에서 다듬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차와도 비슷하지 않게, 우리 브랜드만의 정체성을 살리면서, 게다가 아주 멋있게 말이죠. 보통 능력과 책임감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경영진의 간섭을 심하게 받는 분야이기도 했습니다. 숫자를 좋아하는 경영진으로서는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제시할 수 없는) 디자인을 믿고 출시를 허락해줄 근거가 없으니 불안했을 것입니다. 더불어 생김새야말로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한 마디씩 거들 수 있기 때문에 간섭하고 싶었겠지요.

벨로스터 최종 품평회 때 ‘왜 좌우대칭이 아니냐’며 호통친 최고 경영진 이야기나, 원래 네모로 디자인된 제네시스(현 G80) 헤드램프 내부 렌즈가 ‘라이트는 사람 눈 같아야 한다’는 누군가의 지시 하나로 둥글게 바뀐 일화 등은 이제 낯설지도 않습니다.

기준이 없는 감각의 영역에서 이렇게 주변인들의 간섭이 시작되면 정말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디자인 팀으로서는 매우 골치 아픈 상황인 것이죠.

‘이 디자인이어야만 했다’는 객관적 근거를 출시 전 경영진에게도, 출시 후 소비자에게도 제시할 수 없는 디자인팀. 그렇기에 정말 디자인이야말로 만든 이에 대한 신뢰가 중요합니다. 만든 이를 믿는다면 경영진도 출시 승낙을 좀 더 쉽게 해줄 수 있고, 소비자도 이해의 폭이 넓어질 테지요.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스타 디자이너 스카우트 입니다.

자동차회사들은 스타 디자이너를 모셔오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우리보다 훨씬 유명한 회사의 차를 디자인한, 그 사람 자체만으로도 신뢰가 쌓이는, 그런 디자이너들을 고액 연봉으로 데려왔습니다. 외적으로는 이를 통해 소비자를 좀 더 쉽게 설득하고 브랜드가치를 높이려고 한 것이지만, 회사 내부적으로도 경영진대상 디자인 품평과정을 좀 더 수월하게 통과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것입니다. 해외 유명 브랜드에서 모시고 온 거물 외국인 디자이너한테 회장님이 ‘내가 보기엔 멋 없다’며 한국말로 쏘아붙이기 힘들 테니까요.

하지만 인간세상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공존하는 법.

우리네 회사들이 스타 디자이너 영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 부작용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신입으로 입사해 꾸준히 승진해 오던 사내 토박이 디자이너들이 도외시되고 있다는 점 등은 상대적으로 작은 트러블일지 모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스타 디자이너 자체가 또 하나의 사내 권력층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애초부터 디자인팀의 힘을 키우기 위해 모셔온 존재이기에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스타성’과 ‘카리스마’가 디자인팀 외부의 쓸데없는 간섭을 줄이는 데에만 쓰이리라는 보장은 없지요.

서두에도 언급했듯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릴 때마다 명작을 뽑아내는 천재적 디자이너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디자이너들의 매우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해 다음 번 정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나이 혹은 출신과 상관 없이 여러 디자이너의 갖가지 디자인 안끼리 부딪치고 겨루고 다투며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답 없는 디자인에서 정답에 가까이 도달하는 방법이지요.

방향성 설정과 디렉팅이 주 임무인 스타 디자이너들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디자인진행 과정에서 최선의 결과에 도달할 수 있도록 디자이너들에게 올바른 목적지를 제시하고 길을 터주어야 합니다. 스타 디자이너 본인이 키 스케치(디자인의 씨앗이 되는 스케치)를 직접 그리지는 않지만, 팀원들을 본인의 방식과 스타일로 인도하며 자신의 색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스타 디자이너라는 강력한 입지로 인해, 디렉팅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의 헛발질 방지를 위한 견제 구조가 약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디자인팀에 힘이 없던 예전에는 제아무리 리더이자 디렉터라도 경영진은 물론 사내 여러 조직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그것이 디자인과정에 장애물이 되었기에 이를 막기 위해 스타 디자이너라는 권력자를 데려온 것인데, 이제는 소수 결정권자의 힘이 막강해져 또 다른 부작용이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걸러지지 않은 자신의 헛발질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힘마저 갖고 있으니까요.

쓸데 없는 간섭은 막으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견제는 가능할 만큼의 적당한 권력이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힘든 일이 일개 회사 안에서는 더욱 요원하겠지요. 그래서 뭐든지 맹신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유명한 차를 디자인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라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들은 스타 디자이너라서 언제든지 다른 회사로 이동할 수 있지만, 남겨진 제품을 감당해야 하는 건 회사와 팀원들 이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스타 디자이너 맹신에 젖어있던 한국 자동차디자인 산업이 이제는 그 무엇이 될지 모를 보완책을 찾아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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