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자 대신 로봇, 관리자 대신 AI가 있는 HMGICS [르포]
  • 싱가포르=박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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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1.23 09:47
작업자 대신 로봇, 관리자 대신 AI가 있는 HMGICS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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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8일, 싱가포르 창이공항 제3여객터미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우리나라 7~8월 한낮만큼이나 습하고 무더운 날씨를 뚫고 도착한 주룽 혁신단지에는 판교테크노밸리가 연상될 정도로 많은 유리 건물이 몰려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는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이하 HMGICS)'가 있었다. 

# 사라진 컨베이어 벨트! 셀 생산이 뭐에요?

현대차그룹 HMGICS
현대차그룹 HMGICS

IT기업 사무실같은 외관과 달리 HMGICS 내부에는 전기차 공장이 자리잡고 있다.

생산라인은 매우 낯선 모습이다. 자율주행 로봇들이 부품들을 분주하게 실어나르고 있고,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개 스팟이 곳곳을 걸어 다니며 무언가를 열심히 스캐닝하고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 구조물들까지 새하얗게 칠해져서 정말 미래의 공장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분위기도 달랐다. 자동차 공장이라면 반드시 보게 되는 컨베이어 벨트도 없었다. 수백명의 작업자가 공정 단계마다 서 있는 대신 동그란 타원형의 소규모 작업장 셀(Cell)에 직원 한명이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작업자의 움직임보다 로봇팔들이 움직이는 비중도 더 컸다. 무거운 부품을 들어 옮기는 일은 로봇이 하고, 작업자는 현황을 파악해 의사결정과 간단한 조립만 하고 있었다.

셀 생산 방식은 구조물 내에서 다양한 수요에 맞춰 모빌리티를 생산할 수 있는 형태다.
셀 생산 방식은 구조물 내에서 다양한 수요에 맞춰 모빌리티를 생산할 수 있는 형태다.

셀 생산 방식은 구조물 내에서 다양한 수요에 맞춰 모빌리티를 생산할 수 있는 형태다. 이를 통해 생산하는 차종이 많아지더라도 최적화된 알고리즘으로 생산 계획과 소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당장은 아이오닉5와 이를 기반으로 한 로보택시만을 제조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다양한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현대차 측 설명이다.

생산관리 담당 스펜서 리(Spencer Lee) 매니저
생산관리 담당 스펜서 리(Spencer Lee) 매니저

HMGICS를 둘러보는 과정에서 동행한 생산관리 담당 스펜서 리(Spencer Lee) 매니저는 HMGICS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16년간 항공우주산업 관련 분야에 종사했다는 그는 자동화가 단순 업무 이상의 가치를 보여줄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조립 및 제조 공장에서 일하면서, 부적합 조립은 항상 문제였고, 마지막 단계에서 발견되는 경우 수정에 걸리는 시간 때문에 더욱 골치 아팠다"며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연성과 자동화가 앞으로 생산의 기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든든한 조력자, 로봇

현대차그룹 HMGICS
로봇개 스팟은 작업자가 들여다보기 어려운 곳을 스캔하고 조립 상태를 면밀하게 살핀다.

조립이 거의 끝난 셀에 방문하니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개 스팟이 분주하게 발을 구르며 움직이고 있다. 내장된 스캐너를 이용해 작업자가 들여다보기 어려운 곳을 스캔하고, 이를 통해 차량의 조립 상태를 면밀하게 살핀다. 스팟이 스캔한 조립 부위 사진은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되고, 이를 통해 불량 여부를 판단한다. 현대차 관계자들에 따르면, 인공지능의 검수 능력은 숙련된 근로자 못지않게 정확하다.

자율주행 로봇은 거대한 반조립(CKD) 차체도 운반한다.
자율주행 로봇은 거대한 반조립(CKD) 차체도 운반한다.

물류 작업도 로봇이 한다. 라이다 센서를 내장한 자율주행 로봇들은 부품 박스를 실어 나르는 것을 시작으로, 거대한 반조립(CKD) 차체도 운반한다. 로봇의 진행 경로를 막아 세우니 멀리서부터 빨간 조명을 켜며 멈춰서고, 자리를 비켜주면 다시 움직인다. 로봇 청소기처럼 배터리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스스로 충전기 앞으로 이동한단다.

옥상 스카이 트랙에서 마지막 점검을 거치는 아이오닉5
옥상 스카이 트랙에서 마지막 점검을 거치는 아이오닉5

조립이 끝난 차들은 옥상에 마련된 '스카이 트랙'에서 마지막 점검을 거친다. HMG 드라이빙센터의 오벌 트랙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코스는 100km/h 내외까지 가속이 가능하다. 한산한 외곽 지역에서나 경험할 것 같은 오벌 트랙을 빌딩 숲 사이에서 경험한다는 것부터가 신선했다. 이와 별개로 스티어링 휠의 유격점, 주행 보조 시스템의 정상 작동 여부, 서스펜션의 감쇠력 등 전반적인 부분들이 점검되고 있었다.

# 자동화 공장의 비밀, 디지털 트윈과 5G

현장 관리자들이 운영하는 자동차 공장과는 달리, 이곳에선 프로그래머들이 그 역할을 맡는다. 이렇다 보니 생산시설 위층 한쪽에 자리 잡은 사무실에는 거대한 모니터들로 빼곡했다. 첩보영화에서나 봤을 것 같은 소위 '통합 작전실' 같은 모습이다.

 이곳에선 프로그래머들이 공장 운영과 관련된 전반을 담당한다.
이곳에선 프로그래머들이 공장 운영과 관련된 전반을 담당한다.

모니터에는 알 수 없는 그래프와 데이터로 빼곡했다. 의미는 몰라도 꽤 중요해 보이는 데이터들이었던 탓에 사진을 찍으려는 기자는 한 명도 없었고, 현대차 관계자들도 촬영하지 말아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럴 만도 했다. 대부분은 생산시설을 제어하는 알고리즘과 관련된 데이터들이었다. 각 셀의 생산 현황 및 부품 전달 상황, 로봇들의 정상 작동 여부 등 모든 관제 업무는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인상적인 건 디지털 트윈 기술을 통해 어느 곳에서나 원격으로 공장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현장을 투영한 쌍둥이 공장을 메타버스에 똑같이 구현해 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양재 본사나 남양연구소 등 다른 곳에 머물러있는 직원이 싱가포르에 있는 HMGICS를 제어할 수 있고, 로봇도 디지털 공간 속 쌍둥이 공장의 현황을 반영해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현대차는 이를 '메타 팩토리'라고 정의했다.

공장 내에 배치된 200여 개의 로봇도 모두 5G로 통신한다.
공장 내에 배치된 200여 개의 로봇도 모두 5G로 통신한다.

메타 팩토리와 실제 공장의 끊김없는 연동을 위한 제반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HMGICS 건물 전체를 5G 통신으로 감싼 것이다. 3G나 LTE 통신은 일정 정도 시차가 발생하는 만큼, 공장 현황을 실시간으로 더욱 정교하게 체크할 수 있다는 점에서 5G가 필수적이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공장 내부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에도 5G가 맡는 역할은 크다. 부품 창고에서는 인공지능이 재고를 실시간으로 관리해 조립 공정에서 부족한 부품들을 빠르게 올려보낸다. 공장 내에 배치된 200여 개의 로봇도 모두 5G로 통신하고 있는 만큼 통신 시차로 인해 서로 충돌할 일도 없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포니가 각별했던 이유

취재를 마치고 건물을 빠져나오며 많은 생각이 스쳤다. 현대차그룹은 이제 자동차 산업의 '상식'으로 굳어진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 생산 방식을 뒤흔들 정도로 성장했다. 오랜 기간 경쟁자를 추격하기 바빴던 '패스트 팔로워'가 드디어 당당한 '퍼스트 무버'가 된 느낌이다. 

맨땅에 헤딩하듯 만들어낸 자동차와 첨단 공법으로 제조한 전기차의 모습은 묘한 광경을 연출했다.
맨땅에 헤딩하듯 만들어낸 자동차와 첨단 공법으로 제조한 전기차의 모습은 묘한 광경을 연출했다.

HMGICS가 성공하건 실패하건, 현대차그룹의 과감한 도전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아직 어떤 회사도 HMGICS같은 생산 방법을 고안한 적 없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을 시작으로 기존과 다른 방식의 새로운 모빌리티를 환경을 구축하려는 도전이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기대된다. 뭐, HMGICS가 새로운 '상식'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참 생각을 정리하며 내려온 로비에는 아이오닉5와 함께 포니가 전시돼 있었다. 그 시절, 이렇다 할 기술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만들어낸 자동차와 HMGICS의 첨단 공법으로 제조한 전기차가 함께 서있는 모습은 묘한 감동을 줬다. 척박한 환경에서 '의지' 하나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이 이렇게나 많이 성장했다니,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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