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바이크를 깨워 서울을 빠져나왔다. 팔당댐 인근에 가까워지자, 흙냄새와 축축한 습기가 헬멧 속을 파고들었다. 강원도에 접어들자마자 제법 차가워진 공기에 놀라는 것도 잠시, 이내 비가 내렸다. 첩첩산중으로 접어드니 비는 눈으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고, 이번 취재가 녹록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스쳤다. 

첩첩산중으로 접어드니 비는 눈으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첩첩산중으로 접어드니 비는 눈으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바이크를 몰아 도착한 곳은 강원도 평창에 위치한 용평리조트.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레인보우 슬로프였다. 단풍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와중에 쏟아지는 눈, 그리고 스키 슬로프 앞에 도열해 있는 BMW R1250GS들이 낯선 풍경을 선사했다. 내년 가을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치러질 2024 GS 트로피에 출전할 대한민국 국가대표를 선발하기 위한 현장이다.

# 라이더들의 국가대항전, GS 트로피

알바니아에서 개최된 2022 GS트로피 
알바니아에서 개최된 2022 GS트로피 

현장을 소개하기에 앞서, GS 트로피가 어떤 경기인지 알 필요가 있겠다. GS 트로피는 BMW모토라드가 2년마다 개최하고 있는 '라이더들의 축제'다. 국가별 선발전을 통해 뽑힌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경쟁을 펼치는 국가 대항전이어서, 모터사이클 분야의 올림픽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GS 트로피는 명성만큼이나 험하다. 비포장도로를 주행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기초체력, 협동심, 영어 능력 등 다양한 요구조건이 필요하다. 대회 기간 평균 2000km에 이르는 코스를 주파해야 하고, 개최 지역이 어디인지만 사전에 통지될 뿐, 구체적인 코스를 알 수 없어 예측도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대회에 동행하는 의료 인력들과 스태프, 취재를 위한 기자들까지 바이크를 타고 이동해야 하니, 모두에게 고단한 경기다. 

우리나라의 최고 성적은 5위, 최근 경기에선 8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최고 성적은 5위, 최근 경기에선 8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BMW코리아가 2014년부터 국가대표를 선발해 파견하고 있다. 2020년 뉴질랜드에서 개최된 GS 트로피에선 우리나라가 역대 최고 성적인 5위를 기록했고, 가장 최근 경기였던 알바니아 대회에서도 8위를 기록하며 상위권에 랭크됐다. 

이렇다 보니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GS 라이더들에겐 흥미진진한 이벤트일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 만난 BMW코리아 관계자도 "GS 트로피 국가대표 선발을 위해 재수, 삼수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이번 선발에 도전한 라이더는 여성 3명을 포함한 27명. 이들은 나미비아행 항공권 다섯 장을 두고 경쟁을 시작했다. 

# 결선 같은 예선, 악독함 그 자체

예선 경기부터 만만치 않아 보였다. 코스 대부분이 스키 슬로프 경사로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키 상급자를 위해 만들어진 슬로프다 보니, 공사를 위해 진입해 있는 굴삭기 마저 위태로워 보였다. 

오르막에서의 무게 균형을 잘 잡아나가는 건 모르는 사람들에겐 묘기 아닌 묘기다. 
오르막에서의 무게 균형을 잘 잡아나가는 건 모르는 사람들에겐 묘기 아닌 묘기다. 

오프로드를 낮은 속도로 주파해야 한다는 건 자동차나 바이크가 똑같다. 문제는 바이크가 자동차만큼 쉽게 조작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게 250kg에 육박하는 R1250GS라면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오르막에서의 무게 균형을 잘 잡아나가면서, 장애물을 안전하고도 빠르게 통과해야 하는 건 모르는 사람들에겐 묘기 아닌 묘기다. 살짝 패인 구간이나 야트막한 둔덕은 슬로프의 경사로 때문에 더 험준해 보였고, 통나무로 만들어 둔 장애물은 자동차로 주파하기에도 쉽지 않아 보였다. 눈까지 내려서 바닥까지 질척해졌다. 이렇다 보니 참가자들 사이에선 "예선이 곧 결선 아니냐"라는 농담까지 나왔다. 

피지컬 100'을 현장에서 봤어도 이만한 놀라움은 없었을 것 같다. 
피지컬 100'을 현장에서 봤어도 이만한 놀라움은 없었을 것 같다. 
여성 참가자들도 예외는 없다.
여성 참가자들도 예외는 없다.

기우도 잠시, 참가자들의 농담은 정말 농담으로 끝났다. 스탠드 포지션으로 시야를 확보한 채 출발하더니 웬만한 코스들은 이미 경험해 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통과했다. 바이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묘기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여러 차례 아찔한 순간이 반복되며 참가자들과 갤러리들에게서 놀라는 소리가 여러 차례 나왔다. 

250kg 이상의 바이크가 중심을 잃어도 다리 한 쪽으로 무게를 지탱하고, 넘어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바이크를 일으켜 세워 다시 시동을 걸었다. 다칠 것만 같은 아찔한 상황에선 과감하게 바이크를 집어 던졌다. 

나무를 톱질하며 지구력을 측정한다.
나무를 톱질하며 지구력을 측정한다.
코스를 잘 탄다고 해서 끝날 일도 아니다. 
코스를 잘 탄다고 해서 끝날 일도 아니다. 

코스를 잘 탄다고 해서 끝날 일도 아니었다. 체력 테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묵직한 라이딩기어를 입은 채 스키 슬로프 500미터를 전력 질주 해서 올라가고, 나무를 톱질하며 지구력을 측정한다. 주최 측 관계자들과의 소통, 긴급 상황 대처를 위한 영어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회화 면접까지 이뤄진다. 

반전은 참가자들의 실력 뿐만이 아니었다. 이 악독한(?) 코스를 설계한 건 앞서 GS 트로피 대회에 출전했던 전 국가대표들이었다. 각국의 대회에서 경험했던 코스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현장에서 필요로 했던 능력을 떠올려 만들어진 '기출 문제집'이었다. 매 대회마다 선수들의 기량이 일취월장한다더니, 나날이 어려워지고 악독해지는 코스를 소화하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반전은 참가자들의 실력 뿐만이 아니었다.
반전은 참가자들의 실력 뿐만이 아니었다.
넘어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바이크를 일으켜 세워 다시 시동을 건다.
넘어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바이크를 일으켜 세워 다시 시동을 건다.

코스 설계에 참여한 모터사이클 전문지 '더 모토'의 최홍준 편집장(2014, 2016 GS 트로피 출전)은 이번 예선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했다. "통상 먼저 주행하는 선수들이 손상되지 않은 온전한 코스를 주행하기 때문에 기존엔 앞서 주행하는 사람들이 더 유리했다"며 "오늘 경기는 초반에 눈이 내렸다 보니 오히려 처음 주행하는 선수들이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참여한 최동훈 선수(2018 GS 트로피 출전)도 "대부분의 코스를 경사로에 설계했는데, GS로 경사로를 주행한다는 것 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닌 데다, 눈에 젖은 통나무를 통과하는 것도 유독 미끄러웠을 것"이라며 "시험 구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난이도를 조정하는 부분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된 결선

다음 날 아침 결선은 슬로프 아래 평평한 곳에서 이뤄졌다. 예선보다야 난이도가 낮아진 것 같아 보였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작은 스쿠터로도 통과하기 힘들 것 같은 구간들을 거대한 R1250GS로 주파해야 하고, 일부 구간에서는 바이크의 뒷바퀴를 미끄러뜨려야만 통과할 수 있는 장애물들도 마주할 수 있었다. 

BMW모토라드 본사가 제시한 10개의 구간은 철저한 보안 속에 당일에서야 공개됐다.
BMW모토라드 본사가 제시한 10개의 구간은 철저한 보안 속에 당일에서야 공개됐다.

단순히 통과하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다. 독일 BMW모토라드 본사가 제시한 10개의 구간은 철저한 보안 속에 당일에서야 공개됐기 때문이다. 일부 참가자들은 경험해 본 적 없는 장애물도 있었던 데다, 연습 주행 없이 단 한 번의 주행으로 결과가 판가름 난다. 코스 전반을 이해할 시간도 없이 순간적인 '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들의 바이크를 이용했던 예선과 다르게, 결선은 BMW코리아가 준비한 별도의 R1250GS를 타야 한다. 같은 기종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시트 포지션과 핸들 바의 높이, 클러치 유격점 등 많은 부분의 느낌이 다르다 보니, 적지 않은 난제다. 

코스에 대한 보안은 예상보다 철저했다. 응원을 위해 찾은 갤러리들은 현장을 가까이에서 보기 어려웠다. BMW코리아 측은 기자들에게 결선 코스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 및 상세 코스 사진 촬영을 자제해 줄 것도 요청했다. GS 트로피 국가대표 선발을 위한 '시험 문제'가 예선을 치를 다른 나라에 유출되는걸 막기 위해서였다. 평가 코스는 모든 경기가 끝난 뒤 곧바로 철거되기까지 했다. 

코스에 대한 보안은 예상보다 철저했다.
코스에 대한 보안은 예상보다 철저했다.
넘어지는 선수들이 예상보단 많았다.
넘어지는 선수들이 예상보단 많았다.

본선은 르망 레이스처럼 시작됐다. 출발 신호와 함께 바이크로 뛰어가고, 여기에 준비된 헬멧과 라이딩기어를 체결한 뒤, 바이크의 시동을 걸고 자세를 잡는 것까지 랩타임에 포함된다. 하루 전, 예선 장애물을 즐기듯 통과하던 선수들은 전장에 나가는 군인들 만큼이나 비장하게 라이딩 기어를 착용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코스와 처음 타는 바이크 때문이었을까. 시동을 꺼뜨리고, 넘어지는 선수들이 예상보단 많았다. 라인을 터치하거나 발이 땅에 닿는 감점 요인들이 발생할 때 마다 헬멧을 뚫고 나온 선수들의 탄식이 먼 발치에서도 들렸다. 얼마나 많은 기간 동안 연습을 해왔고, 비포장도로에 익숙해졌는지가 판가름 나는 순간들이었다.

#첫 고비를 넘긴 '국가대표'를 만나다

모든 선수들의 결선 주행이 끝나니 분주해진 건 인스트럭터들이었다. 각 포인트에서 채점한 결과들을 공유하고, 영상으로 기록된 선수들의 주행 장면을 분석해 나갔다. 이를 토대로 랩타임은 물론 코스 이탈 여부에 따라 점수를 깎고, 어디에서 넘어졌으며 발은 땅에 몇 번이나 닿았는지 등이 꼼꼼하게 점검됐다. 

모든 선수들의 결선 주행이 끝나니 분주해진 건 인스트럭터들이었다.
모든 선수들의 결선 주행이 끝나니 분주해진 건 인스트럭터들이었다.

그렇게 채점 결과를 토대로 남성 3명, 여성 2명 등 국가대표 선발이 마무리됐다. 이를 통해 남성 참가자(최병기, 이진수, 엄영롱)들은 나미비아에서 개최될 2024 GS 트로피 출전이 확정됐고, 여성 참가자(김성희, 최혜은)들은 최종 확정을 받기 위한 2차 테스트를 위해 스페인으로 향하게 된다. 

선수 한명 한명이 호명될 때마다 다른 참가자들과 갤러리들 사이에선 박수가 쏟아졌다. 모든 걸 보상받았다는 듯, 순위와 관계없이 모두가 환호했다. 대회 준비 과정에서 고단함 때문이었을까. 국가대표로 확정된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여러 차례 관찰됐다. 

여성 참가자(김성희, 최혜은)들은 최종 확정을 받기 위한 2차 테스트를 위해 스페인으로 향하게 된다. 
여성 참가자(김성희, 최혜은)들은 최종 확정을 받기 위한 2차 테스트를 위해 스페인으로 향하게 된다. 
최병기, 이진수, 엄영롱 선수는 내년 9월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열릴 GS트로피 2024에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최병기, 이진수, 엄영롱 선수는 내년 9월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열릴 GS트로피 2024에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3위에 오른 엄영롱 선수는 그 어떤 선수들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눈에 띄는 피지컬에 직업을 물으니 "대한민국 소방관입니다"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한국 사람 세 명이면 난리가 나는 거 잘 알지 않냐"며 "하면 한다는 마음으로, 뭐 하나 제대로 보여주고 오겠다"는 소감이 나오자, 주변에서 "불을 꺼야 할 사람이 나미비아(2024 GS 트로피 개최지)에 불을 지르러 가게 됐다"며 유쾌한 반응이 나왔다. 

2위 이진수 선수는 해병대 출신이다. 경기 내내 차분한 모습을 이어가던 그는 의외로 경기 준비 과정에서의 체력 훈련이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지난 1년간의 대회 준비를 통해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며 뿌듯한 모습이었다. "에너지를 얻고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며 새로운 동기를 만들어 준 GS는 어느덧 내 삶의 일부가 된 것 같다"며 가볍게 웃었다. 

1위 최병기 선수는 목표를 묻는 질문에 "당연히 세계 1위"라고 답했다.
1위 최병기 선수는 목표를 묻는 질문에 "당연히 세계 1위"라고 답했다.

"아내가 임신 중인데, 아이의 태명이 럭키에요. 배 속 아이가 행운을 가져다준 것 같습니다."

1위 최병기 선수는 2021년 선발전에서 탈락한 재수생이었다. GS 트로피 재수 생활을 하며 예측할 수 없는 대회를 준비하는 기간, 자기 스스로를 다잡는 마인드 컨트롤이 제일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최 선수는 4년 전 GS 트로피에 도전하기 위해 GS를 구입했을 정도로 이 대회의 진심이었다. 

목표를 묻는 질문엔 "당연히 세계 1위"라고 답했다. 지금까지 한국 대표팀이 우승해 본 전력이 없는 만큼, GS 트로피에서 태극기를 휘날려 보겠다는 각오가 돋보였다. 간단한 인터뷰를 끝마치고 기념 촬영을 위해 이동한 그가 태극기를 들고 GS 위에 올라있는 포즈를 취한 모습을 보니 상당한 결기가 느껴졌다. 

선발된 김성희, 최병기, 이진수, 엄영롱, 최혜은 선수(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

이들은 2024년 9월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펼쳐질 GS 트로피 본선 경기를 위한 훈련에 돌입한다. BMW코리아는 대한민국 국가대표들의 훈련에 필요한 사항들은 물론, 대회에서 착용할 라이딩기어와 왕복 항공권 등 현지 필요 사항 일체를 지원할 예정이다. 내년 이맘때, 우승컵을 들고 금의환향햘 이들의 인터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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