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차 그사람] 볼보 디자이너 이정현…'한국인 불모지'를 디자인으로 뚫다
  • 스웨덴 예테보리=전승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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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6.28 14:20
[그차 그사람] 볼보 디자이너 이정현…'한국인 불모지'를 디자인으로 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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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볼보는 '안전' 때문에 선택하는 차였지만, 지금부터의 볼보는 '디자인' 때문에 사는 차가 될지도 모르겠다. 최근 국내에도 출시된 신형 XC90을 시작으로 S90과 V90, XC60, V40, XC40 등 몰라보게 세련된 디자인으로 탈바꿈한 신차들이 줄줄이 출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최근 볼보의 가장 큰 변화는 누가 뭐래도 디자인이다. 2012년 폭스바겐에서 영입한 토마스 잉겐라트를 정점으로 외관은 잉겐라트와 단짝인 맥스 미쏘니가, 실내는 벤틀리 출신의 로빈 페이지가 맡는 등 디자인 드림팀을 꾸렸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드림팀에는 한국 출신의 디자이너도 있다. 바로 볼보가 내년에 선보일 예정인 신형 XC60의 외관을 담당하는 이정현 디자이너. 스웨덴에 방영된 TV 광고에까지 출연했을 정도라니, 현지에서 꽤 인정받고 있는 디자이너임은 분명해 보인다.

스웨덴 예테보리로 날아가 볼보 본사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인, 이정현 디자이너를 만나봤다.

# 공군 전투기 정비사, 볼보 디자이너 되다 

▲ 스웨덴 TV에 방영된 볼보 광고에 등장한 이정현 디자이너

Q. 매력적인 직업인데,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나. 애초부터 디자인을 전공했나?

아니다. 한국에서는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스웨덴 우메오 디자인 대학(Umeå institute of Design)에서 운송기기 디자인 석사과정을 마친 후 볼보에 입사했다.

Q. 기계공학을 하던 사람이 왜 디자이너가 됐나

대다수 남자들처럼 자동차를 좋아했다. 그래서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선택했다. 입대 당시엔 비행기에도 관심이 많아 F4 팬텀 정비병에 지원해 2년 반 동안 복무했다. 기계를 무척 좋아한다. 

좋아하는게 이런 쪽이다보니 고심 끝에 자동차 쪽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그런데 정작 자동차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용하기 쉽지 않았다. 나만의 새로운 아이디어로 차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카디자이너란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무엇보다 디자이너로 일한다면 평생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볼보 XC 쿠페 콘셉트

Q. 카 디자이너가 기계공학까지 전공했으면 좋은 점이 많겠다

장점은 각종 역학에 대해 공부하면서 자동차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지, 어떠한 형태가 공기 역학적으로 좋은지, 엔지니어들이 엔진과 프레스(철판을 찍어내는 장치)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 등을 안다는 점이다. 이는 디자인을 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유용한 배경 지식이 될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와 소통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반대로 이런 지식 때문에 스스로 창의적 아이디어를 제약하는 경우도 있다. 현실화하기 어려운 디자인일지라도 엔지니어와의 협업이나 신기술을 통해 충분히 실현되는 일이 많은데, 스스로 한계를 만들기도 한다. 때문에 기계공학도로 습득한 지식이나 경험은 배경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려고 노력한다. 

Q. 왜 하필 볼보로 오게 됐나

처음 자동차 디자인을 공부하려 했을 때는 우리나라에선 스웨덴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이 디자인 공부를 위해선 미국과 영국, 독일 등으로 가던 시대였다. 그러던 중 남들과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보고 싶었고, 북유럽(특히 스웨덴) 디자인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볼보 혹은 사브를 염두에 뒀다. 당시에는 사브도 명맥이 유지되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볼보 브랜드의 잠재력과 가치가 내 성향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볼보자동차의 디자인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생각해 볼보에 오게 됐다. 

# 이젠 '디자인의 볼보'...물만난 디자이너

▲ 볼보 XC 쿠페 콘셉트는 신형 XC90으로 바뀌었다

Q. 함께 일하는 다른 한국인이 있나?

입사한지 약 6년 반 정도 됐다. 현재 익스테리어 디자인 파트에서 시니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볼보 본사에서는 디자인팀뿐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들었다. 

외관 디자이너는 약 20명이다. 매니저를 포함해 램프와 휠 등 세부 디자인을 맡고 있는 디자이너들을 모두 포함한 숫자다. 디자인 부서에는 디자이너 외에도 클레이 모델러, 캐드 모델러, 스튜디오 엔지니어, CGI 아티스트가 함께 일하고 있다.

Q. 토마스 잉겐라트 총괄(디자인 수석 부사장)이 오면서 디자인이 달라진 것 같은데

아이언 마크(볼보 로고)부터 램프, 차체 비율 등 전에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다. 실제로 최근 세계적인 디자인 시상식에서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볼보의 디자인 변화가 긍정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객관적인 증거다.

Q. 사실 우리 예상을 훌쩍 뛰어 넘고 있다

볼보의 역사 중 요즘이 가장 큰 도전과 변화의 시기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토마스 잉겐라트 한 사람의 힘으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비전을 함께 공유하는 팀원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이 더해져 이룬 성과지만, 볼보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가진 리더의 지휘는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 이정현 디자이너는 볼보 신형 XC60의 외장을 메인으로 담당했다

Q. 이전에 비해 어떤 것이 가장 많이 바뀐건가?

가장 큰 차이점은 차체가 안정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비율을 갖췄다는 것이다. 비율은 자동차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우리가 멀리서 하이에나와 사자를 보았을 때 사자가 주는 인상이 더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얼굴 생김새 뿐 아니라 전체적인 비율 때문이다. 

여기에 볼보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토르(북유럽의 신)의 망치를 형상화한 헤드램프나 아이언마크 등 기존 것들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새롭게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추가됐다. 

Q. 중국 지리의 도움으로 투자가 늘어났나?

지리에서 전폭적이고 충분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실제로 디자인 구현에 비용 제약이 거의 없어졌다. 예전은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드는 디자인은 포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제약이 없으니 보다 다양하고 모던한 디자인 구현이 가능해졌다.

지리가 잘하는 부분이 있다. 자금적인 부분을 지원하면서도 스웨덴 볼보자동차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회사 경영이나 디자인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다. 

# 볼보의 베스트셀링카 'XC60'의 메인 디자이너

▲ 현재 판매되는 XC60. 이정현 디자이너가 이 차를 어떻게 변신시킬지 기대된다

Q. 현재 XC60을 디자인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진행됐나

내년 공개를 앞둔 신형 XC60의 메인 디자이너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외관 디자인은 거의 완성됐다. 전체적인 테마와 프로포션(비율)에 관해서는 대부분 확정이 된 상황이다. 현재는 마지막 디테일에 대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제 마무리 단계라고 할 수 있다. 

Q. XC60 디자인을 미리 귀뜸해달라 

신형 XC60은 최근 한국에 출시된 신형 XC90에 사용된 SPA 플랫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SPA플랫폼으로 인해 가능해진 '프리미엄 비율'을 신형 XC60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프리미엄 비율은 자동차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전체적인 비율'을 보다 안정적이고 고급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다.

Q. 그 프리미엄 비율이라는게 뭔가

예를 들면 신형 XC90은 앞바퀴 축(axle)에서 대쉬(dash)까지의 길이를 상대적으로 길게 유지하고 프런트 오버행 (front overhang)을 짧게 함으로써 더욱 스포티하고 다이내믹한 디자인이 됐다. 

▲ 스웨덴 TV에 방영된 볼보 광고에 등장한 이정현 디자이너

스웨덴에는 ‘라곰(lagom)’이라는 단어가 있다. 지나쳐도 안되고 부족해도 안 된다는 말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평소 자주 사용하는 말인데, 뭐든지 넘치지 않게 알맞은 정도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볼보의 디자인에도 이러한 라곰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신형 XC60은 SPA 플랫폼이라는 좋은 밑바탕을 기본으로, 지나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차분하고 중후한' 스칸디나비안 특유의 비율을 살린 디자인이다. 이런게 프리미엄 비율이라고 할 수 있겠다. 

Q. 결국 별 노력 없이 신형 XC90을 줄였다는 얘기 아닌가

물론 전체적인 비율은 비슷하다. 오히려 디자인에선 그 점을 살려내는게 매우 중요하다. 아직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못하지만, 신형 XC60은 그러면서도 가장 스포티하고 다이내믹한 SUV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이정현 디자이너는 볼보 신형 XC60의 외장을 메인으로 담당했다

Q. 기대가 크겠다

신형 XC60은 볼보의 베스트셀링 모델이기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디자인 작업을 했다. 내년 상반기 공개를 앞두고 있는데, 벌써부터 저를 비롯한 디자인 부서 전체에서 상당한 자신감과 함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정식 공개된다면 디자이너로서 매우 흥분되는 순간이 될 것 같다. 

Q. 앞으로의 계획은?

볼보자동차의 디자인이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새롭게 바뀌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큰 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혁신적인 변화의 한 가운데 있는 볼보자동차에 가능한 더 많이 기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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