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 랭글러는 세계적으로 많이 팔리는 차가 아니다. ‘정통 오프로더’라는 성격 자체가 대중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모델일수록 팬층은 두껍다. 포르쉐 911 팬덤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부족하지 않은 팬심일 것이다. 이런 모델을 파는 자동차 회사는 소비자들의 목소리를 더 잘 듣고 반영해야 한다. 그것이 곧 팬들과 소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랭글러는 팬들의 목소리를 더 잘 반영했다.

지프 4세대 랭글러 루비콘 페이스리프트
지프 4세대 랭글러 루비콘 페이스리프트

기존 랭글러 오너들은 새차를 산 후 여기저기를 튜닝하며 추가 지출을 했다. 범퍼와 하이펜더, 타이어 등이 대표적이다. 그랬던 랭글러가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면서 더이상 그 같은 튜닝이 필요 없게 됐다. 소비자들이 원했던 사양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신형 랭글러의 북미형 범퍼
신형 랭글러의 북미형 범퍼

우선 유럽형 범퍼가 북미형으로 변경됐다. 기존에 ‘오리주둥이’로 불리며 놀림감이 됐었던 범퍼가 북미형 범퍼로 바뀌면서 전체적으로 더욱 강인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원형 주간주행등도 추가됐다. 국내법상 주간주행등은 한 쌍만 장착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랭글러의 주간주행등은 두 쌍으로 이뤄졌다.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한미 FTA를 통해 문제없이 국내 수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방향지시등 또한 노란색이 아닌 붉은색이 적용됐다.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앞 그릴이다. 7개의 세로줄 그릴을 검정으로 바꾸고 그물망 디자인도 추가했다. 초창기 윌리스 지프 이미지를 반영한 디자인 변화는 시선을 잡아 끄는 매력까지 커졌다. 

뿐만 아니라 앞 카메라와 카메라 워셔노즐도 추가됐다. 윈드실드를 안테나와 통합해 보다 더 깔끔한 이미지를 갖췄고, 코닝의 고릴라 글래스를 사용해 내구성 강화도 기대할 수 있다. 엔진후드도 철제에서 알루미늄으로 바꿔 무게를 확실히 덜어냈다. 하지만 측면 사이드 리피터가 빠진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대단히 중요하거나 큰 부분은 아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사소할 지라도 있다 없으면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신형 랭글러의 옆모습
신형 랭글러의 옆모습

펜더도 더 높아졌다. 구조적으로 서스펜션의 상하 움직임을 더 크게 가져갈 수 있고 더 큰 타이어를 장착할 수 있는 기능적인 장점이 크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더 멋있고 랭글러다운 디자인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33인치 AT 타이어를 품은 신형 랭글러
33인치 AT 타이어를 품은 신형 랭글러

타이어는 32인치 MT(Mud-terrain) 타이어에서 33인치 AT(All-terrain)로 커지고 성격도 달라졌다. MT 타이어는 오프로드 성능은 탁월하지만 일상 주행에서는 거칠고 시끄러운 주행 질감과 내마모성의 한계 등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아이템이었다. 그랬던 타이어를 33인치 올 터레인으로 바꾸면서 온로드와 오프로드 모두를 아우르는 대중 친화적인 콘셉트를 품게 된 셈이다.  

신형 랭글러 루비콘 실내 
신형 랭글러 루비콘 실내 

실내도 많이 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8.4인치에서 12.3인치 커진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다. 우선 확실히 빨라졌다. 기존에는 오프로드 페이지를 선택하면 불러오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이제는 바로바로 실행된다. 지프에서는 5배 빨라졌다고 하는데 체감상으로는 그 이상이다. 지프답지(?) 않게 그래픽도 화려해졌으며 고도계도 새로 추가했다. 무선 카플레이와 안드로이드 오토도 가능하며 티맵 내비게이션으로 국내 소비자를 위한 편의성이 커졌다.

랭글러 루비콘 모델에는 나파가죽이 추가됐다. 기대만큼 부드러운 촉감은 아니다. 나파가죽일까 싶을 정도로 뻣뻣하고 강한 촉감이 느껴진다. 나파가죽도 지프 성격에 맞춰 가공한 흔적이 엿보인다.

신형 랭글러 루비콘 우퍼 스피커
신형 랭글러 루비콘 우퍼 스피커

이제는 우퍼 스피커도 탑재된다. 기존에는 오픈형 모델인 파워 톱(Power Top) 사양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던 사양이다. 음향 전문가에게 평가를 요청한 결과 기존의 랭글러 사운드 시스템이 ‘편의점 이어폰’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들어줄 만한 이어폰 느낌이란다. 음향 성능이 전체적으로 좋아졌다는 의미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슈퍼카와 랭글러는 사운드 시스템이 그리 흡족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몇 안 되는 차종이니까.

신형 랭글러는 사이드와 커튼 에어백도 추가됐다. 사고 시 안정성 부분에서 다소 아쉬웠던 랭글러가 부분변경을 통해 실질적인 안전 시스템을 보강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본격적으로 신형 랭글러 루비콘과 함께 주행에 나서보자. 이제 랭글러에는 4기통 2.0 터보엔진만 올라간다. 무거운 프레임보디 차체와 오프로드 전용 4륜 및 동력 전달 구조까지 품은 탓에 엔진이 버거워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저 기우일 뿐이었다. 촘촘한 기어비를 바탕으로 한 엔진의 빠른 반응 덕분에 일상 주행에서 부족함 없는 성능을 발휘한다.

물론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가속 성능의 한계는 보인다. 박력있는 초반 가속감 이후 서서히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랭글러 성격상 고속보다 중저속, 아니면 초저속 영역에 좀 더 초점을 맞춘 세팅이 이유일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기존 랭글러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터보래그가 거의 없어진 것은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이 같은 긍정적 결과는 터보차저의 변화에 있다. 기존보다 크기가 작아진 터보차저가 터보래그를 줄여 엔진 반응성 향상에 이점을 가져다준다. 이는 기술 발전으로 인한 내구성 향상 덕분에 가능해진 변화다. 또한 인테이크 형상을 일부 수정했다. 그러면서 전반적으로 엔진 흡배기 부분의 개선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엔진은 272마력과 40.8kgf.m의 토크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터보차저가 랭글러 실제 구동 출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다이노 테스트를 실시했다. 실제 측정 결과 233마력과 36.16kgf.m를 발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각 약 14.3%와 11.3%의 구동 손실이다. 일반적인 자동변속기 승용차가 15% 전후 구동 손실을 보여주고 있으니 평균 혹은 그보다 좋은 수준의 출력이다.

다만 4륜구동 모드로 측정했을 때는 약 3500rpm 이후부터 노킹 발생으로 인해 출력과 토크에 제한이 발생했다. 그만큼 엔진 부하가 많이 발생하는 환경이라는 것인데, 고회전 영역을 자주 이용하는 소비자라면 고급유 사용을 권장한다.

다시 주행으로 돌아오자. 스티어링휠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보다 더 쫀득해졌다. 기존에 느껴졌던 핸들링 유격도 사라졌다. 덕분에 일상 주행에서 보다 더 편하면서 직관적인 조작이 가능했다. 지프에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조향 계통도 업그레이드한 듯하다. 여기에 타이어도 바뀌면서 주행 감각이 더 세련되게 변했다.

물론 도심형 SUV와 비교하면 여전히 투박하다. 윈드노이즈, 노면 소음 모두 크다. 실내 공간도 차 크기에 대비해 좁은 편이고 앞서 언급했듯 사운드 시스템 만족감도 떨어진다.

무엇보다 요즘 같은 친환경 시대에 연비도 아쉽다. 도심에서 5km/L 전후, 고속도로에서 정속 주행을 해도 11km/L 대를 넘기기가 쉽지 않다. 상황에 따라 랭글러를 메인으로 타고 다닌다면 기름값 지출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랭글러의 단점은 오프로드 주행에서 매력적인 장점으로 피어난다. 4WD 로 모드를 선택하고 전·후륜 디퍼렌셜 록, 스웨이바 분리 기능에 오프로드 전용 속도 유지 기능인 셀렉 스피드, 마지막으로 스포츠+가 아닌 오프로드+ 기능까지… 슈퍼카가 속도를 위해 공간과 소음을 희생하듯 랭글러는 오프로드를 위해 몇 가지 것들을 포기한 것이다. 

실제로 랭글러로 산길을 달리면 다른 차로 느껴보지 못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스포츠카가 빠른 달리기로 스릴을 맛본다면 랭글러는 '정복'하는 재미가 있다. 이게 가능할까? 뒤집어지지 않을까? 하는 길을 묵묵히 오르내린다. 일반 SUV로는 도전이 가당치도 않은 길을 너무나도 쉽게 통과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기도 한다.

신형 랭글러는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기능도 추가됐다. 차는 물론 보행자와 자전거까지 인식하는 긴습제동 시스템을 품었지만 차로 유지 기능과 정차 후 재출발 기능은 빠졌다. 

신형 랭글러 루비콘 후측면
신형 랭글러 루비콘 후측면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오프로드를 가나?” 사실이다. 요즘은 오프로드 주행을 즐길만한 곳도 많지 않다. 하지만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크고 작은 험로를 지나고 탈출할 일이 아주 가끔은 생긴다. 랭글러는 그 이따금의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것 만으로도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슈퍼카도 서킷보다 일반도로에서 가다 서다 하는 상황이 잦지 않던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슈퍼카가 갖는 그 가치를 ‘구입’한다. 랭글러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오프로드 성능과 기술을 품은 차의 가치와 역사를 보고 구입하는 것이다.

신형 랭글러 루비콘의 가격은 기존보다 650만 원이 오른 8040만 원이다. 랭글러 팬들이 아쉬워하며 1000만 원 이상 들여 튜닝하고 바꿔야 했던 부분을 지프가 손보고 챙기면서 올랐다. 자고로 가격 인상은 이래야 한다. 이유 없는 인상이 아니라 납득 가능하고 인상폭 이상의 가치를 전달해야 한다. 이번 랭글러는 그렇게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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