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n 칼럼] 그들만의 자동차 디자인 세계
  • 김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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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29 09:28
[Erin 칼럼] 그들만의 자동차 디자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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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차나 미국차나 한국차나 큰 그릇에서는 점점 비슷해져 갑니다. 어떤 회사든 추구하는 스타일링 방향이 갈 수록 같아집니다. 커다란 그릴을 쓰고, 날렵한 눈매를 갖고, 쿠페처럼 늘씬하고 유려한 실루엣을 뽐내려 하죠. 모든 나라의 회사들이 어떤 나라에든 자동차를 팔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판매지역이 겹치니 만듦새도 생김새도 닮아갑니다. 결과적으로 이제 국가 별 디자인특징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판매지역이 겹치지 않는다면, 혹은 특정 국가만 대상으로 만들었다면, 위의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여전히 다른 어떤 나라의 브랜드와도 비슷하지 않은, 그들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자동차 영역이 있는 것이죠. 바로 일본 경차입니다. 그 중에서도 경형 박스카 시장은 그야말로 희한합니다. 혹자는 갈라파고스라 칭하기도 하듯, 독자적인 만듦새로 진화해 나가고 있죠.

일본의 공간 중시형 경차들은 법으로 정해놓은 가로세로 크기 안에서 계속 풍선을 불고 있는 상황입니다. 규격을 넘을 수는 없지만 공간을 최대한 키워야 하니, 그 안에서 풍선을 불고 불고 계속 불어서 둥근 풍선이 결국 네모난 상자 모양이 된 꼴이죠.

오늘 보실 차는 혼다의 N-VAN입니다. 내놓는 족족 히트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혼다 N시리즈 경차의 최신판이자, 일본 경차시장의 가장 최근에 나온 상용차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힘을 많이 주어 불어넣은 풍선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일본 법으로 정해놓은 경차의 크기한계에 한 결 더 다가선 모양입니다.

애초에 상용차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나 귀여움, 혹은 유려한 디자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충돌안전을 통과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큰 실내공간을 뽑아내야 했죠. 엔진룸은 엔진이 들어있긴 한 건가 싶을 만큼 작습니다. 보닛의 길이가 어른 손으로 3뼘이 채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모든 외부패널은 완전평면에 가깝습니다. 물론, 실제로 완전한 평면을 만들면 오히려 오목해 보이기 때문에 ‘오목해 보이지 않는 선’에서 부풀렸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거의 평면입니다. 내부 패널들도 극도로 얇습니다. 그 얇은 패널에 다수 마련된 수납공간들도 결코 실내공간 쪽으로 돌출되어있지 않습니다. 모두 내부 설계공간 쪽으로 오목하게 파여있지요. 실내공간 용적을 아주 조금이라도 희생하지 않고 0.1밀리리터라도 더 확보하려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수준의 설계입니다. 매우 집요합니다. 이런 차만 계속 만들다 보면 성격이 나빠질 것 같은 생각마저 들어요.

이렇듯 가장 바깥의 디자인과 스타일링부터 실내의 사소한 부품 하나하나까지 모두가 합심하여 히스테릭하게 만들어낸 실내공간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N-VAN이 처음 나왔을 때 우리나라에도 유명해졌던 이유 중 하나가 ‘리터급 모터사이클이 분해 없이 통째로 실리는 경차’ 라는 점 때문이었죠. 실제로 그렇습니다. 혼다 V-VAN에는 리터급 중형 모터사이클이 통째로 실립니다.

1톤트럭, 혹은 쏠라티 정도는 돼야 실을 수 있는 물건을, 우리나라 경차규격보다도 작은 일본 경차에 넣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 실제로 실어본 사람들의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상용차로 장사를 하는 분들에게 더 큰 공간은 더 큰 수입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광활한 실내공간은 분명 N-VAN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바이크가 없어 제가 직접 해볼 수는 없었으나, N-VAN의 시트를 접고 누워보니 ‘정말 뭐든 가능하겠구나’ 싶었습니다. 물론 큰 키는 아닙니다만, 성인 어른인 제가 다리를 쭉 뻗고 누워도 다리 아래쪽과 머리 위쪽에 수십센티미터의 여유공간이 남습니다. 실내크기가 웬만한 캡슐호텔보다 널찍합니다. 레저용으로 구매하는 분들도 많은데, 이 정도면 어른 둘이 캠핑도 충분히 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이렇게 거대한 공간을 불과 몇 초 만에 매우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N-VAN의 조수석과 뒷좌석은 원터치로 접힙니다. 힘을 주고, 무엇을 꺾고, 집어넣고, 누르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트 뒤로 튀어나와 있는 오렌지색 줄, 혹은 레버만 ‘쓱’ 당기면 큰 힘 들이지 않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스르륵 바닥 속으로 접혀 들어갑니다. 물론 사람이 앉아있으면 그 무게 때문에 접히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에만 매우 쉽게 접히도록 설계된 안전한 구조지요. 과거 카니발이나 스타렉스에서 시트를 접기 위해 땀 흘리며 고군분투 했던 기억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역시 기능이란,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기능을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혼다는 사람들이 실제로 실제 상황에서 쓰게 만드는 일을 매우 잘 합니다. 그래서 자동차 실내 패키징의 대가라고 불리기도 하죠.

접혔을 때 평평한 바닥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트이기 때문에 단점도 있습니다. 접었을 때 울퉁불퉁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시트 쿠션도 평평한 것이죠. 시트 위에 올려 놓은 가방은 매우 약한 감속에도 앞쪽으로 쓸려 떨어지고, 조금만 오래 타고 있어도 등이 쑤십니다. 학창시절 책상의자에 쿠션만 둘러놓은 느낌이랄까요. 다행히 운전석 시트는 조수석이나 뒷좌석보다는 인체공학적으로 디자인되어 심하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그 밖에 사소한 설계에서도 사용자를 고려한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일본은 아직도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곳이 더러 있기 때문에, 1엔단위까지 동전을 사용할 경우가 많습니다. N-VAN은 계기반 위를 평평하게 만들어 동전을 ‘잠시’ 올려둘 수 있습니다. 배달 중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든, 자잘한 정산을 하든, 계기반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필요한 액수를 파악한 후 옆으로 쓱 밉니다. 그러면 밀린 동전들이 동전포켓에 다시 쏙 들어가게 만들어놓았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실내 패널 중 어떤 커버에는 센티미터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길이를 측정해야 하는데 자가 없다면, 급할 때에는 실내 패널을 떼어내서 임시 자로 쓸 수 있는 겁니다.

바닥 곳곳에는 짐 고정용 후크가 달려 있습니다. 평평하게 접힌 바닥면에 짐을 실을 경우 (굴곡이 없어) 이리저리 쏠릴 수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함이죠. 또한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다리 부근에는 가림막 같은 것이 꽂혀 있습니다. 만약 화물을 고정하지 않았더라도 운전석 페달부근에 짐이 흘러 들어가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는 등의 사고를 막기 위함입니다.

일본 경차들은 전세계적인 ‘보통 자동차’들과 매우 다르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또한 ‘일본 경차’ 하면 그 안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자동차인 것처럼 보입니다. 완전한 네모에 가까운 박스형 경차들이죠. 경차규격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저들의 디자인은 더 이상 쥐어짜낼 게 없어 보일 만큼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봐야 아름답다’는 시도 있었듯 유심히 들여다 보면 그 안에서도 나름의 세포분열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각각의 용도와 상황에 맞게 무엇이라도 더 해볼 것이 없는지 새로운 구멍을 발견해 개선하고 개발하고야 마는 일본 경차 개발자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죠. 멋있고 유려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집요하게 무언가를 파고 드는 것. 이것도 분명, 자동차 디자인의 역할이자 영역 중 하나입니다.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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