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스케치북이라는 필명으로 인기리에 스케치북다이어리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완님의 칼럼입니다. 한국인으로서 독일 현지에서 직접 겪는 교통사회의 문제점들과 개선점들, 그리고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과 현지 언론의 흐름에 대해 담백하게 풀어냅니다.

 

작년 초 독일의 한 지역 언론에 소개된 사연 하나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에서 화물운송업을 하는 하인리히 하쉬(Heinrich Hasch)가 자동차 번호판을 등록하기 위해 해당 관청에 갔다가 거절을 당한 것.

하쉬는 지역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제 명의로 등록한 차만 서른 대가 넘어요. 그때도 이름 이니셜을 썼고, 다 허가가 나왔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후 하쉬의 사연은 독일 메이저 언론을 통해 소개됐고,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 독일의 자동차번호판 어떻게 생겼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독일 자동차번호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자.

▲ 독일 번호판/ 사진=위키피디아

1번 : 파란색 바탕의 별 모양은 유럽연합(EU)을 나타내며 그 아래에 있는 D는 독일(Deutschland)을 뜻한다.

2번 : 독일 내 도시(지역)를 의미. RA는 라스타트(Rastadt)라는 도시.

3번 : 위에 오렌지 색깔로 되어 있는 표시는 차량 정기 검사 확인증 스티커. 아래는 독일의 16개 주 문장이 관인(인증 도장)처럼 들어가는 자리.

4번 : 알파벳 2개와 숫자 4개까지 최대한 쓸 수 있는 차량 소유자가 선택하고 꾸밀 수 있다.

▲ 기아차 프로씨드 GT / 사진=기아차
▲ 덴마크 자동차번호판. 유럽 연합 내에서도 국가별로 조금씩 디자인이 다르다. / 사진=위키피디아

◆ 나치의 흔적을 용납하지 않는 독일

독일은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킨 나라다. 독일인들은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대내외적으로 다짐했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이어지고 있다. 전범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 법정에 세웠다는 뉴스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을 정도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도 나치·히틀러를 되살리려는 분위기나 움직임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독일 사람들은 과거 히틀러에게 어떻게 현혹됐고,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을 파멸의 길로 끌고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과도한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과 총리에 힘을 분산시켰으며, 공공장소에서 히틀러를 찬양하거나 언급하는 경우 경찰에 바로 조처를 하도록 했다. 아니, 경찰에 끌려가기 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저항에 먼저 부딪히게 될 것이다.

당연히 나치 정권 관련된 이미지나 용어 등의 사용도 금기시되고 있다. 집단 광기를 몸으로 체험한 것이 독일인들만은 아니지만, 이들만큼 철저하게 반성하고 엄격히 통제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철저히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네오나치와 같은 극우주의자들은 존재한다. 이들은 비록 극소수이긴 하지만 경쟁에서 밀린 일부 젊은이들을 현혹해 극단적인 사회 배격 운동을 펼치게 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이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여러 제도를 만들어 잘못된 향수의 싹이 움트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런 노력 중 하나가 자동차 번호판 제도였는데, 하쉬는 이에 저촉됐던 것이었다. 

◆ 자동차 번호판에 금지된 알파벳 조합

하쉬와 인터뷰를 한 지역 언론은 번호판 신청을 거부한 해당 관청에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물었다. 관청의 대답은 명료했다. 연방교통청에서 지정한 규정에 따랐을 뿐 어떤 잘못도 없다는 것. 다시 연방교통청에 문의했다. "왜 하인리히 하쉬의 이니셜 HH가 들어간 번호판이 문제가 되는 건가요?"

이에 대해 독일 연방교통청은 "우리는 KZ, NS 등 나치와 연관된 알페벳 조합을 번호판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권고조항을 두고 있으며, 2010년에 AH와 HH 등을 추가했다"면서 "이 규정을 따르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지역 관청의 판단에 따른다"고 설명했다. 

KZ : 콘첸트라치온스라거 (Konzentrationslager)는 학살의 상징 같은 '수용소'를 의미. 

NS : 나치오날소치알리스무스 (Nationalsozialismus)는 국가사회주의라는 뜻으로 '나치'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옴.

SS : 슈츠스타펠 (Schutzstaffe)은 나치친위대를 뜻함.

HH : 하일 히틀러 (Heil Hitler) 구호와 나치 정권의 2인자이자 SS의 우두머리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의 약자.

AH :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의 약자.

하쉬가 신청한 HH는 자신의 이름인 '하인리히 하쉬'의 이니셜이지만, '하일 히틀러'의 이니셜과 겹쳐 거절당한 것이다. 하일은 원래 성공, 건강 등을 의미하는 단어이자 종교적으로는 구원을 의미하지만, 여기선 '히틀러 만세!' 정도가 된다. 물론 HH가 모두 하일 히틀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지를 없애겠다는, 혹은 의도된 나치추종자들의 시그널을 차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에 하쉬는 "그러면 HH라는 지역명을 쓰는 함부르크 번호판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따졌다. 이에 연방교통청은 "지역의 경우 고유한 표식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선택에 한해서는 금지를 권고한다"고 답했다.

◆ 단호한 독일 정부, 여론이 나빠도 '지킬건 지킨다'

여론은 이런 조치에 대해 정부가 과잉대응을 한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략 '전쟁은 오래전 끝났고, 나치와 히틀러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충분히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 번호판까지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독일은 AS, HH라는 이니셜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인데, 이들을 모두 전범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다.

이런 반응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다. 너무 많은 부분에서 과거사에 대한 규제가 이뤄지고 있어 어떻게 보면 사회 전체가 위축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존경받는 독일이 된 것임을 또한 잊어선 안될 것이다.

특히, 아픈 근대사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 입장에서는 이런 독일이 고맙고,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고 응원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일본의 뻔뻔한 역사 인식과 친일 잔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우리의 현대사를 곱씹을수록 독일이나 프랑스의 모범적인 대응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과연 이 금지 조항이 계속 지켜질 것인지, 아니면 여론에 밀려 변화를 보일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문제지만, 지금까지 취해 온 독일 정부의 일관된 역사관을 보면, 앞으로도 자동차 번호판에서 HH나 AH 같은 약자를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번호판에서조차 과거사를 용납하지 않는 독일의 단호함과 아직까지 친일 청산에 지지부진한 우리나라의 모습이 대비돼 가슴 한켠에 씁쓸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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