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 폭스바겐을 살려 낸 젊은 장교 '이반 허스트'
  • 독일 프랑크푸르트=이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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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3.16 12:40
[스케치북] 폭스바겐을 살려 낸 젊은 장교 '이반 허스트'
  • 독일 프랑크푸르트=이완 특파원 (w.lee@motorgrap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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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3.1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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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업계의 관심이 몽땅 제네바모터쇼에 쏠려있는 동안 폭스바겐은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을 자신들 미디어 사이트에 올려놓았습니다. 신차 소개하기도 부족할 메인 페이지에 말이죠. 그리고 사진 속 주인공에게 'THANK YOU'라며 고마워했습니다.

 

폭스바겐이 메인 페이지까지 동원해 기념하고 있는 사람은 영국 육군 보급단 소속의 이반 허스트(Ivan Hirst) 대령입니다. 아마 이 영국인 장교가 아니었다면, 폭스바겐은 오래전 공중분해돼 자동차 역사 속에서 잠시 언급되는 그저 그런 회사로 남았을 겁니다. 오늘은 폭스바겐의 은인이랄 수 있는 이반 허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 서른 살 소령, 볼프스부르크 공장을 책임지다

▲ 이반 허스트

히틀러가 벙커에서 자살하기 약 2주 전, 그러니까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기 전이었던 1945년 4월 중순, 미군은 '카데에프(KDF) 자동차 도시'라는 좀 특이한 이름의 지역을 점령하게 됩니다. 카데에프는 나치의 문화 및 레져 조직인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으로, 카데에프 자동차는 바로 히틀러가 그토록 원했던 국민차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동차 회사 이름이었습니다.

참고로 카데에프 자동차는 나중에 폭스바겐이라고 이름을 바꾸게 되고, 카데에프 자동차 도시는 볼프스부르크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 됩니다.

1939년 5월에는 카데에프 자동차 공장의 기공식이 열렸지만, 얼마 되지 않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결국 이 공장은 자동차가 아닌 군수품을 만드는 곳으로 바뀌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연합국의 폭격으로 공장 일부가 심하게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이 곳을 점령한 미군은 공장에 남겨진 차량용 부품들을 이용해 군용차량 수리 등에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볼프스부르크는 곧 미 9사단에서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고, 영국은 이 공장을 분해해 기업에 팔아넘길 생각을 합니다. 이 때 공장 매각 및 전차 수리 등을 위해 영국군 책임자가 오게 되는데, 그가 바로 서른 살의 소령 이반 허스트였습니다. 

이반 허스트는 폭스바겐 공장을 단순 정비소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연합군의 폭격에도 포르쉐 박사가 미국에서 가져 들여온 가공 기계들이 무사했고, 생산되다 만 군용 지프 '퀴벨바겐' 등도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반 허스트는 당시 영국 육군 보급단 단장이었던 래드클리프 대령과 논의 끝에 군용차량을 일반 자동차, 그러니까 지금의 비틀로 개조해 보기로 합니다. 영국 본토에서 와야 하는 차량 지원이 너무 늦어지고 있다며 매우 싼 값에 영국군에게 비틀을 제공하겠다고 설득해 2만대의 비틀을 주문받은 겁니다. 

# 분할 매각 실패한 공장, 독일로 넘어오다

▲ 전쟁 직후 비틀 생산하기 시작한 폭스바겐 공장 

1945년 여름 공장 책임자로 부임한 이반 허스트 소령은 같은 해 12월 첫 번째 비틀을 만들어 냅니다. 당시 공장에는 6000여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었는데요. 철판이나 고무 등 원자재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음에도 다음해 초에는 1000천대의 비틀을 생산했다. 당시 천 번째 비틀을 직접 공장 밖으로 운전해 온 이가 이반 허스트 소령이었죠.

1946년 10월에는 1만대의 비틀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비록 싸고 작은 차였지만 폭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장에서 기적처럼 생산된 것입니다. 당시 생산된 비틀은 영국 점령군과 독일 주요 기업 등에 분배됐습니다. 특히, 암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개인 거래가 이뤄질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히틀러가 그토록 바랐던 국민차의 대량 생산이 아이러니하게 점령군 소령의 의지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나 공장이 본궤도에 올랐음에도 매각은 불발됐고, 1948년 영국은 독일에 공장을 넘겨줬습니다. 이후 1955년에는 100만번째 비틀이, 또 1965년에는 1000만번째 비틀이 생산되며 죽었던 공장은 완전히 살아나게 됩니다.

▲ 1955년 1백만 대 비틀 생산 

# 이반 허스트를 향한 VW의 고마움

폭스바겐을 제대로 된 자동차 공장으로 되살려낸 이반 허스트는 대령으로 승진해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이반 허스트의 이런 선택은 당시 점령군에게 필요했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폭스바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폭스바겐은 이반 허스트의 이런 노고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폭스바겐은 매년 이반 허스트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어 회사 내에서 업적을 세운 엔지니어들에게 매년 수여합니다. 또, 볼프스부르크 공장 근처에 이반 허스트 거리를 만들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자료를 발간하는 등 지금의 자신들을 있게 한 은인에 대한 꾸준히 예의를 갖추며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반 허스트는 지난 200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폭스바겐에 따르면 1916년 3월 1일,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따르면 3월 4일이 이반 허스트의 생일입니다. 올해가 태어닌지 100주년 인거죠. 첫 번째 판매용 비틀이 생산된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폭스바겐은 홈페이지 메인을 이용해 이반 허스트에게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최근 폭스바겐은 디젤게이트로 도덕성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단순히 이반 허스트를 기념할게 아니라 전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비틀을 만들어 내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초심을 되찾는 모습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미 너무나 커져 버린 폭스바겐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절박했던 시절의 그 마음만은 간직하고 새롭게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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