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 폭스바겐 제국을 무릎 꿇린 한 장의 보고서
  • 독일=스케치북, 정리=전승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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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9.25 15:59
[스케치북] 폭스바겐 제국을 무릎 꿇린 한 장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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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스케치북이라는 필명으로 인기리에 스케치북다이어리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완님의 칼럼입니다. 한국인으로서 독일 현지에서 직접 겪는 교통사회의 문제점들과 개선점들, 그리고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과 현지 언론의 흐름에 대해 담백하게 풀어냅니다.

 

폭스바겐의 디젤차 배출가스 조작 사건이 알려지고 난 후 계속해서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화요일(22일) 마틴 빈터콘 회장이 결국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독일 내에서는 빨리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과 그가 사건을 직접 마무리하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하지만 후임 회장이 사태를 수습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 따라 포르쉐 최고경영자 마티아스 뮐러(62세)가 금요일 새로운그룹의 회장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특히, 빈터콘 회장뿐 아니라 사건을 책임질 위치에 있는 고위직들도 퇴진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론되고 있다.

▲ 마티아스 뮐러 / 사진=포르쉐

그런데 이 소식과 함께 자동차 제조사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뉴스가 하나 더 전해졌다. EU 집행위원회 마로스 세프코비치 부위원장이 한국의 연합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년 1월 1일부터 배출가스 측정을 실제 주행하며 확인하는 RDE(Real Driving Emissions) 방식을 적용할 것이라 밝힌 것이다. 또, 이미 출시된 디젤차 역시 이 방식을 통해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시키는지 점검하겠다고 말했다.

새로운 연비측정법과 함께 2017년 9월로 예정됐던 RDE 방식이 당장 내년부터 적용되고, 이미 판매된 차량까지 검사하게 된다면, 많은 디젤차가 유로6 기준에 미달된다는 것이 세상에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제조사들 입장에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사실, 업체들은 이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RDE 방식을 2017년이 아닌, 2020년으로 연기해 달라며 로비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폭스바겐 디젤스캔들이 일어나자 EU가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내용은 아직까지 공식화된 것은 아니지만, 세프코비치 부위원장의 인터뷰를 통해 상당 부분 구체화되고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 조작 의심은 ICCT의 프로젝트에서 시작됐다 

배출가스 조작 사건은 이제 폭스바겐뿐 아니라 완성차 업계 전체로 불똥이 튀고 있다. 그리고 이 불똥은 거대한 불길이 돼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사건의 시작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 ICCT의 2014년 보고서 / 출처=ICCT

미국에 본사를 둔 국제청정운송위원회(International Council on Clean Transportation)는 디젤차들이 유로5와 유로6 기준을 실제로 충족시키고 있는지 조사하기로 했다. 물론, 핵심은 질소산화물 배출량이었다.

ICCT는 우선 영국으로부터 유로6 기준에 든다는 6개 차량의 RDE측정 결과를 받았다. 또, RDE 측정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들로부터 6개의 차량 데이터를 더 받았다. 마지막으로 배출가스 실주행 측정과 관련해 최고 기술을 보유한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의 한 연구팀에게 테스트를 의뢰했다. 이때 3대의 독일차가 실험에 참가하게 됐다.

▲ 표-1 테스트에 참여한 차량 정보 / 출처=ICCT 보고서

표-1에 붉은 박스로 표시한 것이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이 직접 테스트를 한 차량이다. 15대 중 이 3대는 유로5를 충족하는 모델, 나머지는 유로6를 충족하는 모델로, 차량 선정도 주행거리가 최소 200km에서 최대 6만3000km까지 다양하게 골랐다. 특히, 시내와 국도, 고속도로, 그리고 오르막과 내리막까지 거의 모든 형태의 도로를 총 6400km가량 달리며 테스트를 진행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참고로 15개의 디젤차 중 10대는 '선택적환원법(SCR)'이 적용됐다. 다음으로는 '배기가스재연소장치(EGR)'가 달린 차가 4대, 나머지 1대는 '희박질소촉매(LNT)' 시스템이 장착된 모델이었다.

SCR은 질소산화물(NOx) 억제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2.0리터 이하급 차에 달기에는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주로 고가의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사용하고 있다. LNT는 질소촉매를 통해 NOx를 감소시키는 것으로, 폭스바겐과 현대기아차 등이 사용한다. EGR은 엔진에서 나오는 배기가스를 한 번 더 순환시켜 NOx를 줄인다.마쯔다의 경우 거의 모든 모델에 이 방식이 적용됐다.

▲ 가로축 CO2, 세로축 NOx 배출가스 분포도 / 출처=ICCT 보고서

이 결과에서 유로6을 만족시키는 모델은 'C(녹색표시)' 하나였다. 'D'와 'B'가 유로5(주황색 라인)를 만족시켰을뿐, 나머지는 모두 기준을 초과했다. 평균 7배 이상 질소산화물이 뿜어져 나왔고 가장 나쁜 건 25.4배, 다음이 24.3배였다.

문제는 웨스트버지니아 대학 연구팀이 테스트한 독일차 3대였다. 이 차들은 B와 F, H로, B는 BMW X5, F는 폭스바겐 파사트, 그리고 H는 폭스바겐 제타였다. X5가 언덕에서만 기준치를 조금 초과했을 뿐 당시 기준인 유로5를 만족시킨데 반해, 파사트와 제타는 기준치에 크게 미달했다.

ICCT와 웨스트버지니아 대학 연구팀은 이 내용을 미국 국립환경청(EPA)과 캘리포니아대기보전협회(CARB) 등과 공유했고, 국립환경청은 폭스바겐에 해명을 요구한다. 폭스바겐은 처음엔 발뺌하면서 자발적 리콜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관계 당국은 리콜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강하게 대응했고,폭스바겐은 결국 프로그램 조작이 있었음을 시인하게 된다. 

▲ 제타 / 사진=VW

만약 6개 회사 15개 모델을 모두를 ICCT와 웨스트버지니아 대학 연구님이 테스트를 했다면 기준치를 초과한 회사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기준치를 초과했다고 다 프로그램 조작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배출가스 조작 게이트'가 아니라 '디젤 게이트'로 확대되기에 충분한 일이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사건 이후 독일 정부는 자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모든 디젤차에 대해 무작위 조사를 할 것임을 밝혔고, 미국도 다른 브랜드들까지 조사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 결과에 따라 또다른 조작이나 업계의 잘못된 관행 등이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아우토빌트의 BMW 의혹 제기, 펄쩍 뛴 BMW

이 와중에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자동차잡지인 아우토빌트가 BMW X3 20d의 NOx 배출량이 기준치 11배를 넘겼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ICCT가 작년과 올해 두 차례에 걸쳐 NOx 메타분석을 했는데, 이 테스트에 참여한 X3가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현재 아우토빌트는 '조작'이라고 했다가 '조작은 아닌 것 같다'고 수정했다).

BMW는 펄쩍 뛰었다. ICCT의 두 차례 조사 어디에도 BMW가 문제 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9월 ICCT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볼보(15배)나 르노(9배), 현대(7배, 준대형 모델) 등이 NOx 기준치를 크게 초과했지만, BMW만 유일하게 유로6 기준치를만족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 표-3 자료=ICCT 보고서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표-3은 표-1의 테스트 차량 목록의 일부인데 A, B, C는 모두 같은 제조사(M1)로 표시되어 있다. 앞서 말했듯이 B는 BMW X5다. 유일하게 유로6 합격점을 받은 C 모델 역시 BMW의 세단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A 역시 BMW의 SUV고, 아우토빌트가 이야기한 X3 20d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아직 아우토빌트가 정확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BMW도 엔진에 따라, NOx 저감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짐작은 가능하다.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 사건으로 인한 파장은 이제 디젤차 전체에 대한 조사로 번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이 엄청난 격변은 ICCT가 만든 한 장의 보고서에서 시작됐다. 이 프로젝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문득, 디젤 엔진을 만든 루돌프 디젤이 지금 상황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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