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언제, 어떻게 만났나…국산차 인수합병 스토리
  • 김상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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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7.14 14:22
그들은 언제, 어떻게 만났나…국산차 인수합병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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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기아차는 한여름에도 살얼음판을 걸었다. 이미 여러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처리됐다.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 기업에 투자를 중단했고, 오히려 빌려준 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또 동남아 화폐가치가 폭락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그 여파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한축을 담당하던 기아차마저 무너뜨렸다.

▲ 기아차 브리사의 일간지 광고

기아차는 계열사를 절반으로 줄이고, 4천3백여명의 인원 감축을 계획했다. 누구도 기아차를 도울 수 없었다. 협력사들도 상황은 악화돼 문을 닫는 곳이 늘었다. 기아차는 현금 일시불로 차를 구입하면 30%를 할인하는 프로모션까지 감행했다. 현금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구내 식당에서는 밥이 끊겼다. 회생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1997년 10월 기아차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김선홍 회장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기아차의 구조조정은 계속됐고, 노조는 체불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을 감행했다. 1998년 기아차는 약 6조65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결국 1998년 6월 기아차의 국제입찰이 확정됐다.

기아 세피아의 신문광고

기아차 국제 입찰에는 현대차, 대우차, 삼성차, 포드가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부 조건이 맞지 않아, 유찰과 재입찰이 반복됐다. 결국 3차 입찰에서 입찰사무국은 현대차의 손을 들어줬다. 기아차 인수에 가장 열심이었던 삼성차는 가장 낮은 점수로 탈락했다.

기아 프라이드의 신문광고

현대차는 채권단으로부터 기아차 3조2800억원, 아시아차 1조5800억원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2조5200억원을 출자로 전환해주는 조건으로 기아차 지분 51%를 취득하고 경영권을 인수했다. 이후 기아차는 22개월 만에 법정관리에서 벗어났다. 현대차는 기아차를 인수하면서, 현대차-기아차-대우차의 삼각구도를 무너뜨렸다.

# 얼어버린 탱크, 대우차

대우차는 1992년 GM과 결별 후,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군산공장을 설립했고, 독자 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또 루마니아 합작공장을 세우고, 폴란드 자동차 회사 FSO를 인수했다. 또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도 조립공장 설립을 준비하는 등 해외 진출에 대한 준비를 했다.

한국GM 누비라의 신문광고

대우차는 1994년 영국 IAD그룹의 워딩 테크니컬센터를 인수해 신차 개발에 착수했다. 1996년 라노스, 1997년 누비라와 레간자 등 연달아 내놓으며 독자개발 모델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대우차의 연간매출액은 약 4조3500억원에 달했다. 1998년에는 쌍용차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탱크주의’를 외치며 승승장구하던 대우그룹과 대우차도 IMF의 칼바람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탱크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더욱이 과도하게 몸집을 부풀렸던 대우차는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대우차의 위기가 대우그룹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은 형국이 됐다.

1999년 8월 대우그룹은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지정됐고, 대우차의 국제 입찰이 시작됐다. 우선 협상자였던 포드는 당시 자금 조달 문제로 인수를 포기했다. 현대차는 기아차를 인수한 직후였기 때문에 큰 돈을 쓸 여유가 없었다. 대우차의 상황은 몹시 나빠졌다. 2001년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됐다. 대우차 측은 교섭에도 지지부진했다. 결국 국제 입찰 3년만에 GM과 매각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2002년 GM는 대우차를 인수하고 GM대우 오토 앤 테크놀로지를 출범했다.

'쉿!'이라는 단어를 내세운 대우 레간자 광고

그리고 2011년 3월 1일, GM은 GM대우의 사명을 한국GM으로 변경하고 쉐보레 브랜드를 도입했다. GM은 대우의 이름이 걸림돌이라고 여겼다. 또 완벽히 GM 소속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글로벌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대우차는 33년의 활동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삼성에게도 불가능은 있었다

삼성그룹의 자동차 산업 진출은 예정돼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자동차 사랑을 모르는 이가 없었고, 삼성중공업은 1992년 7월 상공자원부로부터 상용차 사업을 허가받았다. 당시만 해도 삼성차는 여론을 의식해 승용차 사업은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삼성차는 승용차 사업 진출을 차근차근 준비했고, 1994년 정부의 승용차 사업 허가를 받게됐다. 삼성차는 인력과 기술력이 필요했고, 막대한 자금력으로 경쟁 브랜드의 인재를 끌어모으려 했다. 하지만 삼성차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현대차, 기아차, 대우차는 구성원의 이탈의 막는데 열중했다.

삼성차는 이 와중에 기아차와 쌍용차를 인수할 계획을 세웠다. 삼성차는 기아차 인수에 관심없다고 했지만, 훗날 삼성차가 정부에 제출한 ‘국내 자동차 산업의 구조재편 필요성과 정부의 지원방안’ 보고서, 기아차 인수추진과 관련된 삼성차 내부보고서가 공개되기도 했다.

결국 인수작전은 실패했고 삼성차는 닛산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신차를 만들었다. 삼성그룹 내에서 삼성차로 발령온 직원들은 자동차 생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닛산의 기술자들을 부산 공장으로 데려와 일대일 기술 전수를 받았다.

내구성을 강조했던 르노삼성자동차의 광고.

1998년 삼성차의 첫번째 모델인 SM5가 출시됐다. SM5는 호평을 받았다. 당시엔 닛산과 국산 브랜드의 기술력 차이는 컸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역시 IMF 칼바람이 삼성차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삼성차는 결국 1999년 법정관리에 놓이게 됐다. 이건희 회장은 사재 2조8000억원을 삼성차에 출연했고, 삼성그룹은 삼성차 철수가 아닌 매각을 결정했다. 

2000년 르노가 삼성차의 지분 80.1%를 매입하며 르노삼성차가 출범했다. 삼성그룹은 르노삼성차의 지분 19.9%만 소유하고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단, 삼성그룹은 르노로부터 삼성 이름을 쓰는 댓가로 영업이익이 발생할때 매출의 0.8%를 로얄티로 받고 있다. 

# 격동의 쌍용차

1986년 쌍용정유가 동아차를 인수하면서 쌍용자동차가 시작됐다. 정확히 1988년부터 쌍용자동차로 사명이 변경됐다. 쌍용차란 사명이 쓰이기 전부터 그들의 역사는 다소 복잡했다. 

1954년 설립된 하동환자동차제작소는 동방자동차공업과 합병을 통해 하동환자동차공업이 됐다. 대형버스를 생산하고 해외로 수출했다. 국산 지프를 생산하던 신진자동차공업과 업무제휴를 맺고, 동반상생을 꾀했다. 이후 하동환자동차공업은 동아자동차공업을 설립했고, 신진자동차공업은 주식회사 거화로 사명을 바꿨다. 거화는 코란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거화 코란도의 시작이다. 

1984년 동아자동차공업은 거화를 인수했고, 1986년 쌍용정유(현 에쓰오일)가 그 동아자동차공업을 인수하면서 쌍용차가 시작됐다.

1983년형 거화 코란도 5인승. 이름은 '코란도'로 붙였지만 신진 지프 슈퍼스타와 외관이 동일하다. 이후 동아자동차공업, 쌍용정유로 회사를 옮겼지만 '코란도'라는 이름은 그대로였다. 

쌍용차는 동아차와 거화의 장점을 살려 상용차와 SUV 생산에 매진했다. 쌍용그룹은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메르세데스-벤츠와 기술 제휴를 맺었고, 신차가 쏟아졌다. 하지만 쌍용차 역시 외환위기를 버티지 못했다. 대규모 투자와 신차개발은 오히려 독이 됐다. 쌍용차의 위기는 곧 쌍용그룹 전체의 위기로 번졌다. 이때부터 쌍용차는 고난의 시간의 보내게 된다.

 

대우그룹은 1997년 쌍용그룹과 인수협상을 진행했으며, 이듬해 쌍용차는 대우차로 인수됐다. 대우차는 SUV 라인업의 확대가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쌍용차는 더없이 좋은 상품이었다. 대우차와 쌍용차는 판매망을 공유했고, 쌍용차에 대우차의 엠블럼이 붙어 팔리기 시작했다. 쌍용차의 신차 성적은 좋았다. 체어맨, 뉴 무쏘 등은 여전히 인기가 높았다. 대우차는 쌍용차로 미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대우그룹 역시 외환위기의 여파로 워크아웃 대상기업으로 지정됐다.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2000년 쌍용차는 채권단 주도하의 독자경영체제를 구축했다. 주채권 은행이었던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은 쌍용차 매각을 위해 GM, 푸조시트로엥 등과 접촉했지만 결국 쌍용차를 인수한 것은 중국 상하이자동차였다.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차의 기술력을 빠르게 흡수했을 뿐,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오히려 채권단 주도하에 있을때 쌍용차의 경영이 더 안정적이었다.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차의 아이콘인 코란도마저 단종시켰다. 또 2007년 정부 정책으로 디젤 가격이 치솟아 쌍용차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결국 2009년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후 쌍용차는 구조조정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정규직 및 비정규직 노동자 3천여명이 해고됐다. 쌍용차는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갔고, 2011년 인도 마힌드라에 인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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