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 칼럼] 페르디난트 피에히, 그리고 포르쉐 917의 나비효과
  • 스케치북
  • 좋아요 0
  • 승인 2015.05.18 23:43
[스케치북 칼럼] 페르디난트 피에히, 그리고 포르쉐 917의 나비효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일에서 스케치북이라는 필명으로 인기리에 스케치북다이어리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완님의 칼럼입니다. 한국인으로서 독일 현지에서 직접 겪는 교통사회의 문제점들과 개선점들, 그리고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과 현지 언론의 흐름에 대해 담백하게 풀어냅니다.

 

지난달 독일에서는 커다란 사건 하나가 있었다. 폭스바겐그룹 이사회의 페르디난트 피에히 의장이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를 통해 마르틴 빈터콘 폭스바겐그룹 회장과 거리를 두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는 피에히가 경영진을 내보낼 때 늘상 사용하던 방법이었고, 언론들은 일제히 빈터콘이 피에히로부터 팽을 당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그러아 이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폭스바겐그룹의 최대 지분을 소유한 포르쉐 가문의 한 축인 볼프강 포르쉐와 2대 주주인 니더작센주(州), 그리고 이사회 노조 대표 등이 빈터콘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 페르디난트 피에히 前 의장(우)과 마틴 빈터콘(좌) 회장

예상치 못한 반격에 결국 피에히는 사임 의사를 밝히고 오스트리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5월 초 폭스바겐그룹의 경영 보고회에서 피에히와 빈터콘의 회동이 있을 거라는 보도가 있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사태 수습을 위한 만남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저승사자, 살아 있는 전설, 신들의 신이라는 여러 평가를 받은 피에히는 지금의 폭스바겐 그룹을 만든 장본인이다. 아우디가 자랑하는 콰트로와 차량 경량화, 공기저항 기술, TDI 등은 모두 피에히가 아우디 사장으로 재임하며 일궈낸 성과다. 또, 적자에 허덕이던 폭스바겐을 흑자로 전환시키고 지금의 공룡 자동차 기업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 포르쉐 917을 만들고 있는 페르디난트 피에히 前 의장(좌)

뿐만 아니다. 부가티와 벤틀리 같은 수퍼카와 럭셔리카 등을 그룹에 합류시켰고, 바이크 업체 두카티와 디자이너 주지아로의 이탈디자인의 지분을 100% 인수했다. 페이튼을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드레스덴에 맞는 유리공장을 지었고, 자동차 팬들을 위한 테마파크 ‘아우토슈타트’도 건설했다. 피에히를 빼고서는 독일 자동차와 산업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할 정도로 그의 역할과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렇다면 피에히의 이름을 알린 시작점은 언제였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약 반세기 전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 자동차 한 대에 올인한 젊은 엔지니어 피에히

피에히는 외할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기술 유전자를 가장 잘 물려 받은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1960년 대 중반, 20대 후반의 나이로 포르쉐 개발담당 자리에 오른 피에히는 포르쉐의 사운이 걸린 프로젝트를 몰래 진행을 하게 된다. 메르세데스나 BMW 등 대형 자동차 업체와의 자동차 경주 대회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차를 만드는 것이다. 

▲ 페르디난트 피에히 前 의장(우)과 포르쉐 917

당시 국제자동차연맹은 25대 이상의 판매 가능한 동일한 모델을 검사를 받아야 양산형 레이싱카로 분류하고 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폭스바겐으로부터 받은 지원금은 피에히가 원하는 수준의 917을, 그것도 25대나 만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고민하던 피에히는 어머니이자 포르쉐 박사의 딸인 루이제 피에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917 제작과 레이싱 참가가 가능한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차가 바로 포르쉐의 전설 917이다.

피에히는 자서전에서 "917을 통해 포르쉐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이 확신이 프로젝트를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 집념으로 만든 괴물차 포르쉐 917의 탄생

917을 위해 준비된 엔진은 4.6리터급 12기통의 멋진 공랭식 엔진이었다. 하지만 기술적 고민거리들이 그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고속에서 양력이 증가해 차가 떠오르는 현상을 막아내는 기술이 시급했고, 무게 제한에 맞추기 위해 차체 중량을 최소화 해야했는데, 결국 피에히는 우여곡절 끝에 560마력, 46.9kg·m의 강력한 힘을 내는 첫 번째 917을 세상에 내놓았다.

▲ 르망 대회에 참가한 포르쉐 917

차는 완성됐지만, 르망 레이스에 출전하기 전까지 제대로 된 실전 테스트를 할만한 시간이 없었다. 다양한 테스트를 통해 문제점를 찾아내고, 드라이버가 차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특히, 드라이버들은 시속 300km가 넘어갈 때 917의 조정안전성이 불안하다며 레이스에 참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반대할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피에히는 국제자동차연맹의 허가를 받았고, 917을 끌고 레이스에 출전하게 된다. 첫 출전한 1969년도 내구 레이스에서는 기계적인 문제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1970년과 1971년 르망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 917을 만들며 깊어진 갈등…포르쉐, 소유-경영권 분리

917은 72년부터 73년까지 북미 캔암 레이싱에서도 우승하며 당시 최고 레이스 자동차로 사랑받는다. 그러나 폭스바겐은 피에히에게 '더 이상 돈 먹는 하마인 917에 대한 지원은 어렵다'면서 지원을 중단한다. 당시 폭스바겐은 앞바퀴 굴림의 수랭식 엔진을 사용하는 새로운 레이싱카를 만들기로 결정한 상태여서 포르쉐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르망 대회에 참가한 포르쉐 917

가뜩이나 917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은 피에히로 인해 회사 경영권을 둘러싼 포르쉐 가문의 갈등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폭스바겐의 지원 중단은 큰 타격이었다. 결국 피에히는 포르쉐에서 쫓겨나듯 떠나야했고, 포르쉐 경영에 외가와 친가 후손 누구도 참여하지 않고, 전문 경영인을 두는 것으로 최종 합의를 본다.

◆ 피에히와 포르쉐 917의 나비효과

포르쉐를 떠난 피에히는 잠시 벤츠에서 개발고문 역할을 하며 다임러 측에 5기통 엔진 승용차를 만들라는 제안을 한다. 이후 엔진 제작을 지휘하며 5기통 엔진 5개를 납품하는데, 이 엔진은 나중에 아우디에서 다시 개발 되었고, 지금까지도 일부 모델에 장착돼 판매 되고 있다.

벤츠를 나온 피에히는 조르제토 주지아로를 만나 디자인에 대한 공부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두 동갑내기는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오며 폭스바겐그룹 안에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공기저항 기술과 차량 경량화 등 피에히가 관심을 갖았던 부분들은 아우디로 이어져 ‘기술을 통한 진보’라는 타이틀로 부활하게 됐다. 

 

이 모든 역사의 시작은 917부터였다. 917에 대한 열정과 거기서 얻어낸 기술력은 피에히를 자동차 업계의 전설로 만들었고, 자신을 쫓아낸 포르쉐를 드라마처럼 인수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했다. 현재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선도하는 거대한 폭스바겐그룹도 917을 만든 피에히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지금은 비록 무대 뒤로 쓸쓸히 퇴장했지만, 피에히가 남긴 여러 유산은 자동차 역사에서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