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애스톤마틴 라피드S, 진화한 그랜드 투어러
  • 김상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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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1.08 11:11
[시승기] 애스톤마틴 라피드S, 진화한 그랜드 투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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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투어러(Grand Tourer, GT)는 무척 포괄적인 개념이다. ‘장거리 주행을 위한 고성능 자동차’엔 꽤 많은 차가 포함된다. 더욱이 고성능 자동차의 속도는 계속 상향 평준화되고 있고, 차체 제작 및 IT 기술의 발전으로 장거리 주행에 적합한 차란 표현도 이젠 의미가 꽤 퇴색됐다.

요즘은 훌륭한 GT를 판가름하는 것에 미적인 아름다움이나 고급스러움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애초부터 GT는 남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됐을만큼 외모가 충줄해야 했다. GT는 무수히 많아졌지만 이런 근본적인 목적에 충실한 차는 그리 많지 않다. 또 전문적으로 GT만을 생산하는 브랜드도 크게 줄었다. 애스톤마틴은 대대로 GT를 만든 대표적 브랜드다.

애스톤마틴이 내놓은 최초의 차들은 스포츠카의 성격이 강했지만, 1955년 코치빌더 틱포드(Tickford)를 인수하면서부터 급격하게 호화로운 이미지가 높아졌다. 당시 애스톤마틴의 소유주였던 데이비드브라운(David Brown)는 무엇보다 미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최고의 코치빌더라고 손꼽히던 이탈리아의 토우링(Touring)과 작업을 함께 진행하고, 고급차 브랜드 라곤다까지 인수했다.

라곤다를 인수한 애스톤마틴은 DB4를 기반으로 제작한 4도어 GT ‘라곤다 라피드’를 내놓는다. 라곤다 라피드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단 55대만 생산된 후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애스톤마틴은 4도어 GT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1976년 후속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라곤다’를 출시한다. 하지만 라곤다 역시 16년이란 긴 시간 동안 645대 판매라는 초라한 성적을 냈다. 블룸버그는 라곤다를 가장 못 생긴 차로 뽑았고, 타임즈는 최악의 차로 선정하기도 했다.

# 부활한 라피드

애스톤마틴은 라곤다란 이름을 버리고 라피드란 이름을 다시 꺼내들었다. 2006년 콘셉트카를 공개하고 200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를 통해 양산형 모델을 선보였다. DB9의 차체를 늘리고, 뒷문짝을 추가했다. 또 한정판 모델 ‘원-77’에 적용된 애스톤마틴의 최신 디자인을 반영했다. 시승한 라피드S는 2013년 공개됐으며, 라디에이터 그릴과 앞범퍼, 리어 스포일러 등의 일부 디자인이 변경됐다.

 

신형 DB9의 디자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얼굴을 가졌는데 차체 길이는 무려 300mm 가량 더 길다. 하지만 전혀 기형적인 느낌은 없다. 오히려 루프 라인을 부드럽게 기울인 탓에 쿠페의 유려함을 그대로 간직했다. 또 B필러가 없어서 언뜻 보면 4도어인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매끈하다.

 

애스톤마틴은 황금비율을 적용해 디자인 밸런스를 맞췄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실루엣 때문에 손해보는 부분도 생겼다. 뒷문짝을 넉넉하게 만들지 못했다. 뒷좌석이 좁은 것은 둘째치고 문짝이 작으니 차에 타는 것부터 문제다. 일단 몸을 구겨 차에 들어간다해도 그리 쾌적하진 않다. 2+2 구조라 뒷좌석은 각각 독립됐고, 거대한 버킷 시트 때문에 시야도 답답하다.

 

그럼에도 라피드S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실내 소재의 감촉이 무척 뛰어나서다. 조금 좁은 것은 충분히 눈 감아줄 수 있다. 수억원을 호가하는 스포츠카 중에서도 유독 가죽 표면이 부드럽다. 최고급 가죽 제조 업체 ‘브리지 오브 위어(Bridge of Weir)’의 풀 그래인 가죽은 천연 가죽의 질감을 잘 살렸다. 낙인이나 해충에 물리지 않은 소를 사용해 가죽을 만든다. 또 가공 작업도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실시한다. 원재료부터 수작업이 진행되는 셈이다.

 

천장이나 필러 등에는 알칸타라로 마감됐는데, 천장은 퀼팅으로 처리된 가죽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또 애스톤마틴도 페라리나 람보르기니처럼 얼마든지 자신의 취향대로 실내를 꾸밀 수도 있다. 바닥 카펫의 색상만 해도 기본적으로 12가지가 제공된다.

 

또 라피드S에는 꽤 많은 짐을 적재할 수 있다. 트렁크 공간은 일반적인 스포츠카와 큰 차이가 없지만 뒷좌석을 접을 수 있기 때문에 부피가 크거나 길이가 긴 짐도 쉽게 넣을 수 있다.

 

4인승이긴 하지만 라피드S 역시 여느 애스톤마틴과 마찬가지로 앞좌석의 편의가 극대화됐다. 디자인은 DB9과 큰 차이가 없다. 크리스탈로 제작된 계기바늘과 시동키는 영롱한 빛을 낸다. 센터페시아에 오밀조밀 모인 각종 버튼은 아날로그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진다. 고풍스럽기도 하지만 영국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전자식 파킹 브레이크가 달린 것도 특징이다. 다른 애스톤마틴은 운전석 왼쪽 편에 핸드 브레이크가 놓인다.

 

# 달리기에 능수능란한 그랜드 투어러

문짝은 살짝 비스듬하게 위로 열린다. 도로 연석이 높은 곳에서 유리한 점도 있지만 이 또한 멋이다. 조금이라도 남과 다름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애스톤마틴의 발상이다.

가죽 시트는 감촉이 우수한 것은 물론 기능적으로도 충실하다. 옆구리나 다리 측면을 감싸는 부위는 조금 더 딱딱해서 몸을 효과적으로 잡아준다. DB9과 마찬가지로 시동키를 꽂으면 V12 자연흡기 엔진이 거센 숨을 내쉰다. 특별한 가상 사운드 시스템 따위는 사용하지 않는다. 배기음은 이탈리아 스포츠 부럽지 않게 매혹적이다. 페라리처럼 격렬하진 않다. 대신 더 웅장하고 풍부하다.

 

DB9을 탄 직후였지만 오히려 라피드S의 움직임이 더 경쾌하게 느껴졌다. 라피드S의 엔진 성능이 살짝 높긴 하지만 부쩍 늘어난 무게를 생각하면 의외의 몸놀림이었다. 실제로 제원상 속도도 더 빠르다. 아무래도 ZF의 6단 자동변속기의 영향이 커 보인다. 부드러움과 격정적인 모습을 표현한다. 엔진의 힘을 쥐어짜내는 실력도 수준급이다. 라피드S는 출발부터 온힘을 뒷바퀴에 쏟아낼 수 있다.

엔진회전수가 높아질수록 엔진음은 날카로워지고 배기음과 절정에 달한다. 패들시프트를 당기는 순간, 차체가 격렬한 몸부림을 치면서 뒤통수가 헤드레스트에 달라붙는다. 지속적인 헤드뱅잉의 반복이 이어지는데, 4단으로 시속 200km에 도달한다. 참고로 아벤타도르 LP700-4는 3단에서 시속 200km를 넘었다. 

 

분명 빠르기에 있어서 라피드S가 내세울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4초대에 도달하는 차는 십년 전에 비해 부지기수로 늘었다. 또 라피드S는 자연흡기 엔진이지만 다른 스포츠카에 비해 엔진회전수를 높게 가져가지 못한다. 페라리처럼 8천, 9천RPM까지 사용하는 극도의 스포츠성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속도를 높일 순 있다. 

 

GT에겐 편안함을 동반한 최고속도가 더 중요하다. 시속 50km나 시속 250km에서 일관적인 스티어링 반응이 유지되고, 진동이나 소음도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 스포츠 모드가 아닌 이상 6단 변속기는 부드럽게 단수를 높인다. 마치 안락한 세단을 타고 있는 기분이다. 560마력의 최고출력이 풍요롭게 다가온다. 꾸준하게 자신의 한계까지 속도를 높인다. 

 

고속주행에서의 안정적인 제동도 GT의 덕목이다. 비록 카본세라믹 브레이크 시스템은 아니지만 앞바퀴 디스크의 지름만 해도 15.7인치에 달한다. 웬만한 소형차 휠 크기에 달하는 수준이다. 2톤에 달하는 거대한 라피드S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속도를 뚝 낮춰버린다. 

# 애스톤마틴의 근성

애스톤마틴처럼 기구한 생을 보내고 있는 브랜드도 드물다.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풍파를 정면으로 맞았다. 세계 대전으로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고, 그후에도 애스톤마틴은 이쪽저쪽으로 팔려 다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애스톤마틴의 색은 잃지 않았다. 인수한 브랜드의 개성을 말살시키기로 유명한 포드 밑에서도 애스톤마틴은 전통과 특징을 지켰다. 오히려 라인업을 확장하면서 도약을 위한 발판까지 마련했다.

 

새로운 플랫폼이나 엔진, 첨단 기술 도입은 상대적으로 기반이 탄탄한 경쟁 브랜드에 비해 미진하다. 하지만 애스톤마틴은 여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S가 붙지 않는 라피드는 사실상 판매에 실패했지만, 애스톤마틴은 굴하지 않고 이를 더 다듬어 완성도를 높였다.

 

이렇게 완성된 라피드S는 그 형태나 아름다움의 발전 외에도 근성 있게 4도어 GT를 연구하고 발전시켜온 애스톤마틴의 의지가 담겨있다. 포르쉐 파나메라와 비교하기엔 라피드의 역사가 훨씬 깊고, 4도어 GT를 바라보는 애스톤마틴의 순수성은 뜨겁다.

* 장점

1. 거대한 크기를 무색하게 만드는 유려한 디자인.

2. 호화로운 실내. 최고급 소재를 최고의 장인들이 손으로 작업했다. 

3. 뛰어난 안정감을 발휘하는 주행성능. 

* 단점

1. 분명 빠르고, 배기음도 거칠지만 의외로 운전이 재밌진 않다.

2. DB9과 마찬가지로, IT 기술의 도입이 늦다.

3. 뒷좌석의 면적보다 시야가 좁은 것이 더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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