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쫓은 사나이의 도전과 열정…도요타는 그렇게 시작됐다
  • 아이치현 도요타시=김상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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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9.25 13:08
꿈을 쫓은 사나이의 도전과 열정…도요타는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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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원은 상기된 얼굴로 우리를 거대한 기계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 방직기는 도요타방직회사가 1924년 내놓은 ‘G형 자동직기’로 자동으로 실이 교체되고, 한올의 실만 끊겨도 저절로 작동이 중단되며…” 그때까지만 해도 지루한 설명만 계속될 줄 알았다.

정신이 육체를 떠날 찰나, 안내원은 방직기 동작레버를 잡아당겼다. 철컥 철컥. 일정한 박자로 베틀이 작동했다. 기계식 방직기에는 크고 작은 톱니 바퀴가 맞물렸고, 수천개의 부품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며 직물을 만들었다.

▲ 쿠라가이케 기념관에서는 도요다 가문이 어떻게 도요타자동차를 만들었지에 대한 아주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눈이 번쩍 띄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방직기의 매커니즘이 마치 자동차의 엔진과 다를게 없다고 느껴졌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피스톤과 연속적인 흡입·압축·폭발·배기의 과정이 떠올랐다. 도요타자동차의 창업자 ‘키이치로도요다(Kiichiro Toyoda)’도 자동방직기를 만들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쉴새없는 출장 일정에 심신이 지쳤지만,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시에 위치한 도요타 ‘쿠라가이케(鞍ケ池)’ 기념관의 오래된 방직기는 도요타자동차 창업자 키이치로도요다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 발명가 집안의 대를 잇다 “피는 못 속여”

연간 천만대의 차를 생산하는 도요타의 시작은 작은 방직회사였다. 키이치로의 아버지인 사키치도요다(Sakichi Toyoda)는 1867년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근대화를 바라보며 발명가의 꿈을 키웠다. 그는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부업으로 베틀을 돌리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당시 베틀은 두손과 한발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무척 고된 일이었다.

▲ 도요타자동동직기제작소를 세운 사키치도요다(좌측)와 도요타자동차를 설립한 키이치로도요다(우측).

그는 일본 전통에 따라 가업을 이어가야 했음에도 목수가 되는 길을 뒤로 하고 밤낮으로 베틀 설계와 제작에 땀을 흘렸다. 결국 그가 23세가 되던 1890년 목제 자동직기를 만든다. 이후 계속된 개선과 개량을 통해 1926년 ‘G형 자동직기’를 내놓는다. 사키치는 G형 자동직기를 통해 20여개의 특허를 받았다. 당시 G형 자동직기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했고, 영국 회사 ‘플랫(Platt)’은 이 특허권을 전부 사들였다. 이를 통해 사키치가 세운 ‘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는 큰 수익을 얻게 됐다. 

키이치로가 이 자금을 바탕으로 자동차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당시 수익을 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 전직원에게 동등하게 나눠줬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회사는 더욱 단단해졌고, 키이치로가 자동차에 매진할 발판이 마련된 것은 확실하다.

▲ 사키치와 키이치로가 만든 G형 자동직기.

도요타자동차가 존재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 G형 자동직기 제작에는 키이치로도 크게 기여했다. 사키치를 꼭 빼닮은 키이치로는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아버지와 함께 G형 자동직기 제품화에 매달렸다. 쿠라가이케 기념관에는 그가 노트에 그린 G형 자동직기 설계도가 아직도 남아있다.

◆ 자동차에 대한 원대한 꿈을 품다

사키치는 기업이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것과 직원을 가족처럼 여겨야 한다는 신념이 누구보다 강했다. 그 공로로  1927년 천황과도 독대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아들 키이치로에게 “나는 자동직기 발명을 통해 나라에 충성했으나, 너는 자동차를 통해 애국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들 부자는 1920년대 중반부터 일본 사업을 시작한 포드와 GM를 주시하고 있었고, 자동차산업이 도요타의 새로운 돌파구란 것을 직감했다.

키이치로가 본격적으로 자동차 제작의 꿈을 키운 것은 1929년 미국과 유럽을 방문했을 때다. 미국의 자동차 열풍과 포드의 대량생산 시스템은 키이치로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키이치로는 일본에 돌아오자마자 가솔린 엔진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 엔진을 제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경쟁업체가 생기면서 G형 자동직기의 인기는 예전같지 않았고, 자동차 개발에 열중할 수가 없게 됐다. 키이치로는 새로운 방적기 개발에 무게를 실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동차에 대한 꿈은 떨칠 수 없었다. 다행히 방적기 부품을 생산하면서 주조, 단조 등의 가공 기술을 익혔고 이를 자동차 엔진 제작에 응용할 계획을 세웠다. 결국, 1933년 키이치로는 방직기 회사 내에 자동차 부서를 만들고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 언제나 도전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동차 부서에 속한 십여명의 직원들은 일과 시간이 끝나고 작은 창고에 모여 엔진 제작에 몰두했다. 철 가공 기술은 충분했지만 가솔린 엔진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쉐보레의 차를 구입해 직접 분해하며 각 부품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가까스로 미국차를 본떠 소형 엔진을 만들지만 신통치 않았고, 회사의 반대는 더욱 커졌다. 당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드는 것은 대기업인 미쓰비시, 미쓰이재벌 등도 엄두내지 못했던 것이다.

▲ 도요타자동차 1대 사장을 지낸 키이치로의 매형 리사부로가 유럽과 미국을 돌며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얻었기도 했다.

하지만 키이치로는 1935년 크라이슬러 ‘에어플로우’와 유사한 디자인을 갖춘 ‘A1 프로토타입’을 내놓는다. 섀시와 변속기는 쉐보레 것을 썼다. 또 자동차 부서가 정식으로 사업의 일환이 됐다. 그리고 1937년, 드디어 ‘도요타 자동차공업 주식회사(Toyota Motor Co., ltd)’를 설립한다.

▲ A1 프로토타입.

약간의 운도 따랐다. 일본 정부에서 국산차 장려정책을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절호의 기회였지만 도요타에서는 당장 내놓을 차가 없었고 부랴부랴 ‘G1 트럭’을 만들었다. 포드 트럭을 상당 부분 모사했지만 G1 트럭은 도요타의 첫번째 시판차로 기록된다. G1 트럭에는 3.4리터 6기통 엔진이 장착됐고, 최고출력은 65마력을 발휘했다. 

G1은 미국 트럭에 비해 가격은 저렴했지만 1935년 9월부터 그해 말까지 총 15대가 판매되는데 그쳤다. 고장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키이치로는 자신의 트럭이 고장날때면 구매자를 직접 찾아가 사죄하고 어떤 점이 문제였는지 분석했다고 한다. 키이치로의 이런 완벽주의와 품질에 대한 집념은 도요타를 더욱 발전시켰다.

▲ G1 트럭. 포드의 트럭과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같은해 도요타는 최초의 승용차 ‘AA’를 출시한다. AA는 A1 프로토타입의 디자인을 다듬어 더욱 세련된 모습을 갖췄다. 앞뒤 문짝이 서로 마주 열리는 방식이 적용됐고, 당시 일본 도로에는 마차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배려한 두가지 종류의 경적을 달았다. 뒷좌석 손잡이로 일본 전통 공예품이 사용되기도 했다. 엔진은 G1 트럭과 같은 ‘모델A’가 장착됐다. 도요타는 AA와 함께 GA 트럭, DA 버스 등을 선보이며 제품을 다양화했다.

▲ 도요타의 첫번째 승용차 AA.

◆ “나는 절대로 직원들을 해고할 수 없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도요타는 자유롭게 승용차를 만들 수 없게 됐다. 코로모시(현 도요타시)의 도요타 생산 공장은 군수공장으로 지정됐다. 승용차가 아닌 군용 트럭을 생산하는 상황에 놓이자 키이치로는 크게 상심하고 도쿄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키이치로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지만 막상 전쟁이 끝나니 더 큰 어려움이 닥쳤다.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 경제는 급격히 어려워졌고,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긴축정책을 펼쳤다. 이미 닛산과 이스즈 자동차는 직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 도요타 코로모 공장. 도요타의 영향력이 커지자 코로모시는 도요타시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키이치로는 절대 직원들을 해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더이상 자산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노동조합과 ‘해고는 없을 것’이라는 각서를 썼다. 하지만 도요타의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급기야 직원들의 임금을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키이치로는 스스로 도요타를 떠나게 된다.

키이치로가 사장에서 내려온 후 도요타는 일본은행의 도움으로 겨우 파산을 면했다. 하지만 도요타자동차는 생산을 맡는 ‘도요타공업’과 판매를 맡는 ‘도요타판매’로 분리됐고, 30여년이 지나서야 두 회사는 다시 합병하게 된다.

◆ 그래도 도요타의 도전은 계속됐다

도요타는 도요다 가문이 아닌 전문 경영인 ‘이시다타이조(Ishida Taizo)’이 맡게 된다. 이시다는 꽤 의리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도요타를 정상 궤도에 올린 후 키이치로에게 사장직을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도요타는 6·25 전쟁때 미국의 요청으로 군용 트럭을 제작하며 회사 경영을 정상으로 돌렸다. 이윽고 키이치로를 찾아가 복귀할 것을 요청했다.

▲ 미국의 요청으로 도요타는 한국전쟁에서 사용할 군용트럭을 제작했다. 이를 계기로 도요타는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키이치로는 이를 거절했다. 제대로 된 승용차를 만들지 않는다면 도요타는 의미없다고 했다. 실적을 위한 판매가 아닌 본질적으로 좋은 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이치로의 거절에도 도요타 간부들은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고, 결국 키이치로는 복귀를 결심한다. 

키이치로는 레이싱카를 만들어 자동차의 한계를 테스트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잘 대응할 수 있는 차를 만들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이를 기반으로 미국이나 유럽에 뒤지지 않는 일본차를 만들고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그의 손에서 이뤄지지 못했다. 복귀를 몇달 앞둔 시점, 그는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 도요타의 역사적인 차, 크라운.

키이치로의 도전은 끝났지만, 도요타의 도전은 계속됐다. 1955년 일본 자동차 역사에 빛나는 도요펫 크라운을 내놓았고, 1957년 최초로 미국 수출을 시작했다. 1962년에는 도요타 자동차 생산 백만대를 돌파했으며 1966년에는 현재까지 가장 많이 판매된 차로 기록되고 있는 코롤라를 출시하며 전세계에 도요타를 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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