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롱한 정신, 젖은 스폰지 같은 팔다리로 차를 몬다. 시차 적응이 안된데다 비행기에서 잠을 설쳐서다. 8년째 타는 내 BMW 3시리즈는 뿌득뿌드득하는 잡소리를 내면서 인천공항을 출발, 올림픽대로를 달린다. 아니 기어간다고 해야 맞겠다. 암 이래야 서울이지. 극심한 정체를 경험하니 비로소 우리나라에 돌아온 기분이 든다. 

앞에는 BMW가, 양 옆에는 벤츠와 아우디가 서있는 따분한 풍경. 요즘 서울은 독일보다 독일차 비중이 더 높은 것 같다. ‘강남 쏘나타’라 불리는게 농담이 아니라 어쩌면 지겹다는 의미의 비아냥 같이 들린다.

반면 내가 48시간 전 뉴욕에서 탔던 차는 어떤가. 이들에 비해 얼마나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나. 내구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올림픽도로에 렉서스는 한대도 보이지 않는다. 렉서스의 최신예 스포츠카 RC F를 타고 렉서스와 도요타가 가득한 뉴욕 거리를 질주한게 불과 48시간전인데, 벌써 오래전 추억처럼 느껴진다. 마치 그런일은 없었다는 듯 벌써 아련하다. 

◆ 48시간전...뉴욕주 화이트플레인즈시

뉴욕 화이트플레인즈시 리츠칼튼 호텔. 호텔 입구에는 따끈따끈한 렉서스 RC와 RC F가 도열해 있었다. 길을 지나던 몇몇 미국인들이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알록달록한 RC들은 그만큼 멋졌다.

▲ 뉴욕주 리츠칼튼 호텔앞에 렉서스 RC F와 RC들이 도열해 있다

반짝이는 은색도 훌륭하고, 빛나는 파란색도 아름다웠지만 가장 눈에 띄는건 역시 오렌지색 바탕에 보닛과 천장이 까맣게 카본으로 구성된 차였다. 극도로 대비되는 색상이 너무나 눈에 띄어 이 차를 타는것 만으로도 마치 대단한 일탈을 하는 기분도 들었다. 만약 '빈수레'를 이렇게 꾸미면 소위 '양카'가 되겠지만 이 차의 카본 보닛 아래에는 무려 5.0리터 477마력 엔진이 뜨겁게 돌아가고 있으니 감히 얕볼 수가 없다.

사실 RC F는 하드코어적인 스포츠카 느낌은 아니지만, 포르쉐 911 카레라S(400마력)나, BMW M3(431마력)나 벤츠 C63 AMG(457마력)보다 강력하다. 요즘 같은 다운사이징 시대에 더 팔팔해진 자연흡기 V8 엔진이라니 무척이나 반갑다.

 
▲ 보닛과 천장이 카본으로 만들어진 렉서스 RC F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 차를 보자마자 멋지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우선 렉서스의 박력있는 스핀들 그릴 덕분일게다. 그동안 괴상하다고 생각됐던 부분이 이제는 오히려 장점이 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다. 렉서스도 스포츠세단까지 염두에 두고 이런 과격한 디자인을 밀어 붙인것 같다. 

헤드램프는 이제는 평범해진 제논 램프 대신 3개로 구성된 LED램프를 넣었고, 렉서스 특유의 L자 모양 주간주행등과 함께 과감함을 강조한다. 또 돌출된 휀더와 에어로파트들도 함께 조화를 이루며 이 차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 렉서스 RC F를 타고 공도를 질주하다

'뉴욕의 가을'이라는 영화에선 뉴욕을 참 아름답게 그렸지만, 실제 뉴욕의 가을 도로는 무질서한 건축물에, 공사장에, 차들까지 엉켜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어지간한 화려함이 아니면 어수선한 분위기에 그대로 묻혀 버린다. 평화로운 유럽을 달리는 독일차들이 절제미를 강조하는 반면 미국 차들이 화려함을 강조하는건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RC는 이곳에서도 워낙 튀는 디자인이어서 우리 일행이 탄 차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 뉴욕 화이트플레인즈시를 달린 렉서스 RC와 RCF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니 서스펜션도 독일차처럼 딱딱하게만 해서는 안되고 적당한 부드러움과 단단함을 조합해야 한다. 렉서스로선 미국이 가장 큰 시장인만큼 철저하게 이에 만족하는 특성을 지녔다. 우리나라 도로는 독일보다 미국쪽에 훨씬 가까워 어쩌면 이같은 세팅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렉서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의 폭력적인 힘을 다루기 쉽고 부드럽게 가다듬었다. 그러면서도 밟으면 밟는대로 나가는 느낌과 사운드로 운전자를 자극한다. 엔진은 IS F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출력이 12%가량 올랐다. 더구나 전기로 구동되는 캠을 통해 정속 주행에선 엣킨슨 사이클(Atkinson Cycle)로 동작하며 우수한 연비까지 구현하고 있다. 전용 8단 변속기는 2단부터 모든 단에 직결(락업 클러치)을 하는데 착착 체결되는 느낌이 매우 훌륭하다. 

▲ 렉서스 RC가 뉴욕의 한 도로에 줄이어 서 있다.

GTA 게임을 통해 눈에 익은 미국 풍경이라서인지 나도 모르게 가속페달을 꾹 밟고 질주하고 말았다. 하지만 수시로 나타나는 경찰차가 두려워 설레는 마음을 자꾸만 억눌러야 했다. 비록 이렇게 제한된 속도에서지만 사운드제너레이터 덕분에 실제보다 박진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점은 마음에 든다. 가속페달에 따라 '고오오'하고 괴성을 낸다. 우렁찬 사운드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도 난다. 본격 스포츠쿠페인만큼 엔진회전수에 따라 음대역이 바뀌는 독특한 매력도 느낄 수 있었다. 별도의 전자장비를 이용한 사운드제너레이터(Active Sound Control)을 이용해 듣기 좋은 소리를 내주는 것이다. 사운드에 가속감까지 더해져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 렉서스 RC F로 몬티첼로 서킷을 달리다

뉴욕주의 몬티첼로 서킷은 인근 부자들이 멤버십을 가입해 운영되는 서킷이다. 3킬로 가량의 길이지만, 고저차가 있고 급코너가 많은 반면 직선주로는 거의 없어 RC 같은 작은 스포츠카의 매력을 느끼기에 적합하다. 

RC F는 서킷에서 훨씬 더 매력적이다. 꽤 가파른 첫번째 코너에 들어가면서부터 절로 감탄이 새 나온다. 핸들은 그리 날카롭지 않지만 경쾌하고 정교하다. 코너에서 횡G를 버티는 힘도 대단하다. 차체의 강성도 놀랍지만 중심도 낮은 편이어서 차를 미끄러뜨리고 충분히 돌려놓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든다.

힘이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중립적인 핸들감각을 유지하는 힘이 대단해 어지간해선 오히려 뒷바퀴를 미끄러뜨리는게 만만치 않다. 계기반에는 그래픽을 통해 뒷바퀴의 양쪽에 전달되는 힘이 분주히 오르내리는걸 볼 수 있다. 이 차에는 TVD(토크벡터링 디퍼런셜) 시스템이 장착돼 있어서다. 이 시스템은 코너에서 가속페달을 밟아도 양 바퀴의 힘 전달을 적절히 배분해 오버스티어와 언더스티어 모두를 크게 감소 시킨다. 요즘 다른 브랜드는 브레이크를 이용해 토크벡터링 효과를 흉내내는 경우가 있지만, FR에서 이처럼 적극적으로 토크를 배분하는 차는 렉서스 RC F뿐이다. 이 TVD 기능은 은 슬라롬, 노말, 트랙 등 3가지 모드로 선택 가능한데, 슬라롬에서 가장 크게 작용한다. 

▲ 뉴욕 몬티첼로 서킷에 렉서스 RC F 스포트(왼쪽)가 서 있다. RC F와는 전혀 다른 자동차지만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토크벡터링 옵션을 선택하지 않으면 토크센싱(토센=Torsen) 방식의 LSD가 장착된다. 앞서 몰았던 차에 비해 오버스티어가 쉽게 일어나는 느낌이었지만,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고 드리프트를 원하는 경우에 유리하다는 장점도 있다.

서킷에서 느끼기엔 브레이크나 가속페달이나 핸들 모두 날카롭지 않게 만들어진게 특징이었다. 매우 다루기 쉽고 안심할 수 있어 예상보다 훨씬 높은 속도까지 올리며 서킷을 공략할 수 있었다. 

◆ 렉서스 RC 350 F SPORT도 뒤지지 않아

이어서 탄 RC 350 F스포트(F SPORT)는 출력이 약간 떨어졌지만 매력은 적어지지 않는 차였다. V6 엔진을 장착해 313마력을 내는데, 이 정도라면 충분히 재미있고 남을 정도다. 차체가 더 가볍고 엔진 사운드도 순수해서 주행감각에 매력이 더해진다. 무엇보다 운전자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느낌이 훨씬 강하다. 적응형 가변 서스펜션도 운전자를 든든하게 만드는데도 일조한다. 

더 좋은 점은 코너를 돌때 뒷바퀴가 운전자가 핸들을 돌리는 반대방향으로 2도 가량 꺾이면서 그립을 높이고 언더스티어와 오버스티어를 줄여주는 점이다. 이같은 4WS시스템은 RC F에는 장착되지 않았다. 

요즘 다른 스포츠쿠페처럼 RC도 주행모드를 몇가지로 바꿀 수 있는데 이 중 스포트플러스(SPORT+) 모드를 선택하면 락업클러치의 직결을 좀 더 즉각적으로 시행해 변속 충격이 커진다. 여기서 ESP 버튼을 한번 눌러 해제하면 계기반에 전문가모드(EXPERT MODE)가 나타난다. 이렇게 하면 스핀이 일어나기 직전의 극단적인 순간에만 전자장비가 개입한다. 

전문가라고 꼭 패들 시프트를 이용해야만 하는건 아니다. 인공지능적인 AI-Shift 기능은 D모드에서도 운전자가 핸들을 조향하는 상황과 G 센서를 읽어들여 차가 코너에 들어가는 상황인지 직선도로를 달리는 상황인지 파악하고 이에 맞도록 적절하게 시프트업-다운 시점을 조정한다. 코너에서 자동으로 시프트업을 해버리면 코너를 벗어 날때는 추진력을 잃게 되고 시프트 다운을 하면 그립력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 산길을 두대의 렉서스 RC F가 달리고 있다

◆ 렉서스 RC란 무엇인가

어쩌면 렉서스는 재미없는 자동차를 만드는 브랜드였다. 짜릿함 보다는 조용함과 부드러움, 편안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보닛 위에 위에 샴페인잔을 쌓아 올리고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도 무너지지 않던 광고부터가 그랬다. 아무 소리와 진동이 없는게 무슨 재미가 있겠나. 하지만 렉서스는 누가 뭐래도 꿋꿋하게 조용하고 부드럽고 신뢰할 수 있는 차를 만들었다. 이는 유럽 브랜드, 특히 BMW가 스포티함을 내세웠던 것과는 반대의 행보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타고 있는건 대체 뭔가. 이게 진정 렉서스인가 믿어지지 않는 정도다. 

 

따지고 보면 RC는 렉서스 브랜드의 전환점이다. 적어도 프리미엄 브랜드라면 이처럼 강력하고 고급스런 스포츠쿠페를 갖추는건 필수다. 이런 차를 갖는게 프리미엄과 그렇지 않은 브랜드를 나누는 기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선지 렉서스는 RC를 IS쿠페나 GS쿠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세단의 쿠페형 모델이 아니라 독자적인 모델이라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섀시부터 달리 했다. 차를 3등분으로 나눠 각기 다른 차들의 몸체를 가져왔다. 후면은 본래 IS 차체지만 전면은 대구경 타이어를 적용하기 위해 GS에서 가져온 섀시를, 중앙은 강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컨버터블용인 렉서스 IS C의 섀시를 가져왔다. 그 결과 일반 IS에 비해 굽힘 및 비틀림 강성이 1.5배 가량 높아졌다. 엔진과 변속기를 튜닝하고 차체의 각 부위를 쿠페에 걸맞도록 새로 설계했다는 설명이다. 

물론 도요타는 이 차에 RC라는 새 이름을 붙였지만, 서킷 위에서 운전 할때는 자꾸만 본능적으로 IS라는 이름이 새나온다. 짜릿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옛 여인의 이름을 부른 것 같은 미안함도 들었다. 

렉서스는 고성능 스포츠카까지 만드는 프리미엄 메이커로 거듭나겠다는 방향을 세워두고 특유의 방식으로 착실하게 진행하고 있다. 렉서스 슈퍼카 LFA에 이어 RC까지 박수를 받을 수 있을지 시장의 반응이 무척 기대 된다. 

◆ 장점

- 든든한 섀시, 안정적인 거동으로 안심하고 주행할 수 있는 주행감각. 

- 내구성, 신뢰감 높아 믿고 탈 수 있다.

- 멸종이 가까운 V8 대배기량의 매력

◆ 단점

- 스포츠 쿠페임에도 짜릿함, 스릴이 덜하다

- 연비는 그리 좋을리가 없다

- 독일차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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