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 역사의 비극' 빛을 못본 비운의 차들 [주말의MG]
  • 박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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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2.16 09:22
'한국 자동차 역사의 비극' 빛을 못본 비운의 차들 [주말의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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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계속 자동차를 만들고, 대우자동차가 여전히 건재했다면 우리나라의 자동차 시장은 어땠을까? 쌍용차가 준중형 세단 시장에 진출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까? 많은 자동차 업계 관계자들이 하는 '만약에'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산차 업체들은 IMF 외환위기와 법정관리 등 다양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터그래프에서 양산이 좌절된 비운의 국산차를 모아봤다. 

# 삼성 SSC-1, 우리에게도 이런 차가 있었다

삼성화재 교통박물관이 소장중인 SSC-1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유튜브)
삼성화재 교통박물관이 소장중인 SSC-1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유튜브)

SSC-1은 1997년 등장한 모델이다. SM5가 1998년에 공개된 모델인 걸 감안하면, SM5보다도 1년 앞서 세상에 먼저 공개된 삼성자동차였다. 당시 국산차에선 볼 수 없었던 미드십 구조를 적용한 모델로, SM525V에 탑재됐던 2.5리터 V6 엔진을 탑재해 최고출력 190마력, 최고속도 230km/h를 발휘했다. 

SSC-1이 삼성자동차의 고유 모델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원천기술 대부분은 외국에 의존한 것이었다. 닛산 300ZX의 섀시를 활용했고, 실내 편의사양 일부도 닛산 세피로에서 가져왔다. SM525V에 공유됐던 6기통 엔진도 닛산의 VQ25 엔진을 기반으로 했고, 테일램프는 토요타 수프라에서 가져왔다. 

삼성은 SSC-1을 양산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콘셉트카나 연구용 차량에선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연비 인증(10.1km/L)까지 받았고, 각종 모터쇼와 전문 매거진을 통해 차량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왔다. 왜 양산되지 않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IMF 경제위기와 삼성자동차의 몰락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삼성 SEV,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거야?'

SVC에 탑승한 이건희 회장 (출처 = KBS 부산)
SVC에 탑승한 이건희 회장 (출처 = KBS 부산)

SEV는 삼성이 SSC-1보다도 먼저 시작했던 프로젝트다. 삼성자동차 출범 전 삼성중공업이 주도했던 전기차 프로젝트로, 1992년 개발을 시작해 1993년 대전 엑스포를 통해 첫 결과물인 SVC를 공개했다. 1회 충전으로 85km를 주행할 수 있었던 첫 모델은 삼성전자, 신라호텔, 에버랜드 등 삼성의 주요 계열사에서 VIP 운송용으로 활약했다. 

이후 공개된 SEV-3와 SEV-4는 일반도로 주행까지 염두해 개발됐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SEV는 납축전지를 탑재해 최고속도 130km/h, 1회 충전 주행거리 180km를 확보했고, 니켈아연전지, 니켈메탈수소전지 등의 고용량 배터리팩을 적용해 400km대에 이르는 주행거리를 발휘하는 모델도 연구되고 있었다.

성능만 놓고 보면 지금의 전기차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이지만, SEV도 끝내 양산되지 못했다. 충전 인프라 등 전기차에 대한 제반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 쌍용차의 세단 개발 프로젝트, 상하이차 먹튀의 아픈 기록

상하이차에서 출시한 로위 350. 쌍용차가 개발을 맡은 모델이다.
상하이차에서 출시한 로위 350. 쌍용차가 개발을 맡은 모델이다.

쌍용차는 상하이자동차에 인수된 이후 모노코크 섀시 기반의 준중형급 SUV 프로젝트 C200과 준중형 세단 프로젝트 B100, 중형 세단 U100 개발을 추진했다. C200은 이후 코란도C 라는 이름으로 출시돼 투싼, 스포티지와 직접 경쟁했지만, 아반떼를 겨냥했던 B100과 쏘나타를 노렸던 U100은 끝내 양산되지 못했다. 중국 측에서 이렇다 할 자금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쌍용차가 독자적으로 추진해왔던 프로젝트는 '기술 이전' 이라는 명목 하에 아무런 댓가 없이 중국으로 이전된다. B100은 로위 350 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생산됐고, 쌍용차가 주도적으로 개발해왔던 U100의 노하우는 상하이차의 중형세단 로위 750으로 녹아들었다. 이후 상하이차가 두 모델의 국내 생산을 약속했지만, 이 마저도 지켜지지 않았다. 

두 차량의 개발이 완료된 이후인 2009년, 상하이차는 끝내 쌍용차를 내다버리듯 매각했다. 쌍용차의 거의 모든 기술이 마땅한 댓가 없이 이전된 상태였다. 두 모델은 상하이차가 쌍용차를 연구 개발 하청 용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결정적인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 대우 쉬라츠, 에쿠스보다 먼저 V8을 준비중이었다

대우 쉬라츠 
대우 쉬라츠 

쉬라츠는 대우차가 1997년 출시를 목표로 개발하고 있던 대형 세단이었다. 국산차 최초로 V8 엔진을 탑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세단을 목표로 개발됐지만, 이 시기 IMF와 함께 대우그룹이 몰락함에 따라 사진으로만 남게 된 자동차다. 만약 출시됐다면 에쿠스보다도 앞서 국내 최대 배기량 및 최대 크기의 차라는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쉬라츠는 2.5리터 직렬 6기통 엔진과 4.0리터 V8 등 두 종류의 엔진 탑재를 계획하고 있었다. 여기에  LCD 클러스터, 내비게이션, 차간거리 경보 시스템, 지능형 브레이크, 측면 에어백 등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이었던 편의사양들을 탑재할 계획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쉬라츠가 세상에 나오지 못한 건 쌍용차 인수와도 관련이 깊다. 당시 대우는 쌍용차를 인수하며 체어맨 이라는 플래그십 세단을 갖게 됐고, 이에 따라 쉬라츠의 필요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설령 연구개발을 그대로 이어갔어도 쌍용차 인수로 인해 이렇다 할 자금을 마련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 현대차 PO, YF 쏘나타 닮은꼴 트라제 XG 후속

현대차 포르티코 콘셉트
현대차 포르티코 콘셉트

프로젝트명 PO는 현대차가 트라제 XG의 후속모델로 개발하고 있던 크로스오버 MPV였다. 토요타 벤자, 크라이슬러 퍼시피카, 시트로엥 C4 피카소 등 7인승 MPV를 직접 경쟁 상대로 겨냥했고, 2005년 공개한 콘셉트카 포르티코를 계승한 차명과 스타일링을 적용할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PO는 2010년 이전 출시를 목표로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북미에서 위장막을 쓴 시험주행 차량이 여러 차례 포착됐기 때문이다. 당치 촬영된 사진들을 보면, YF쏘나타를 통해 선보인 디자인 아이덴티티 '플루이딕 스컬프쳐'가 반영되어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O가 양산되지 못한건 금융위기 여파로 주력 시장이었던 미국 경제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현대차는 이 과정에서 PO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미니밴 라인업을 그랜드스타렉스(TQ)로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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