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썸녀’와 관계가 미지근해졌다. 주말에 가끔 만나도 커피 아니면 술.

벌써 똑같은 패턴만 보인다면 분명 날 지루한 남자로 생각할게 뻔하다. 관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주말 드라이브를 계획했던 것이 결국 캠핑으로까지 발전했다.

“주말에 캠핑갈래?” 용기내 물었다. 메세지를 확인했지만 답변이 없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더 끌린다. 구차하게 답변을 기다리진 않고 “친구들이랑 다같이 가자”고 메세지를 또 보냈다. 그제서야 답장이 왔다. 일단 생각해보겠단다. 역시 쉽지 않다.

처음엔 드라이브를 계획했지만, 이어 둘만의 캠핑, 왁자지껄한 단체 캠핑으로 계획은 조금씩 수정됐다. 어쨌든 매번 똑같은 만남보다는 분명 효과가 높을거다. 캠핑이 주는 설렘과 분위기에서 우리는 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거다. 비로소 흑심 가득한 캠핑이 시작됐다. 

◆ 큰 차가 필요했다

어색함을 덜어줄 썸녀의 친구가 두명이나 섭외됐다. 약간 당황스러웠다. 짝을 맞추기 위해 가장 외모가 떨어지는 충각 둘을 섭외했다. 그래서 총인원은 여섯명. 큰차가 필요했다.

 

몇몇 미니밴을 후보에 올렸다. 도요타 시에나, 혼다 오딧세이, 시트로엥 그랜드 C4 피카소 정도. 시에나는 2열 시트가 독립식이기 때문에 후보에서 배제됐다. 띠엄띠엄 앉으면 자칫 어색해질 수 있으니 그녀들은 2열에 쪼르르 태우는게 좋겠다. 오딧세이는 완전 독립식은 아니지만 2열 가운데 시트는 불편해보였다. 점차 그랜드 C4 피카소로 굳혀지는 분위기.

더욱이 그랜드 C4 피카소는 독특한 디자인과 아기자기한 매력이 곳곳에 숨어있다. 탁 트인 시야는 그녀들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선물할 것이다. 또 대형 글라스 루프는 낮이면 파란 하늘과 구름으로, 밤이면 달과 별로 가득찬다. 흑심을 낭만으로 치장하기엔 더할 나위없다.

 

막연하게 바다로 갈 생각만 했지 목적지도 정하지 못했다. 그녀들은 바다가 좋다고 했다. 수차례 검색을 통해 장소는 안면도 몽산포 캠핑장으로 정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몇 걸음 걸으면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이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텐트와 의자, 테이블 등을 준비했다. 혹시 몰라 침낭도 챙겼다. 의외로 캠핑장비의 무게나 부피가 적은 것에 새삼 놀랐다. 또 설치도 쉽다. 못하는게 없는 믿음직한 남자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어서 빨리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설레임 가득한 만남, 여심을 사로잡아라

이른 아침 출발하기로 했다. 일요일이지만 방심하단 고속도로에서 시간만 허비할 수 있다. 더욱이 몽산포 캠핑장은 선착순 입장이다.

 

아침에 모여 차에 짐을 싣는데, 공간이 꽤 남아돈다. 굳이 3열 시트를 접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나는 스스로 3열에 앉기로 했다. 헌신적인 모습을 연출할 생각이다. 대신 2열 시트를 앞으로 조금 밀어서 다리 공간만 어느 정도 확보했다. 긴다리가 가끔 불편할 때도 있다. 어쨌든 3열도 컵홀더나 수납공간이 적절하고 시야도 탁월해 안면도까지는 충분히 갈 만해 보였다. 

 

친구 중에 한명이 늦잠을 잤다고 했다. 약속 시간은 30분 미뤄졌고, 조금씩 속이 타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정확히 약속 시간을 42분 넘겨서야 나타났다. 일단 나온게 어디냐. 아직 머리의 수분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화장만큼은 두터웠다.

“와, 이차는 뭐에요? 완전 처음 보는데” 상기된 얼굴로 그녀들이 물었다.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그랜드 C4 피카소가 생긴게 평범하진 않지 아무렴. 앞뒤를 번갈아 살피던 그녀들은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대기 바빴다. 특히 가느다란 그릴과 연결된 LED 주간주행등의 오묘함은 여심을 사로잡았다. 또 마땅히 두꺼워야 할 것 같은 필러가 얇고, 유리면적은 거대해 가슴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 들거다. 

 

그녀들은 자질구레한 짐을 많이도 갖고 왔다. 부피가 작은 짐은 2열 발판 밑 수납공간에 넣었다. 비밀 공간을 알게된 그녀들은 눈이 동그래졌다. 과자와 음료수는 접이식 테이블에 올렸다. 운전사와 짐꾼 그새 내비게이션 사용법을 까먹었다. 터치 패널을 통해 디자인을 깔끔하게 하긴 했지만 직관적이 않아 평범한 20대 남성도 처음엔 조작이 쉽지 않다.

 

◆ 시간은 금이다, 도로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줄여라 

6명이 탔고 온갖 짐을 실었다. 그래도 힘이 달리지 않는다. 디젤 특유의 견인력이다. 디젤 엔진의 높은 토크에서 나오는 초반 순발력은 국내서 판매되고 있는 수입 미니밴과 가장 차별화된 점이다. 물론 크기가 더 작지만 시에나나 오딧세이에 비해 무게는 약 400kg이나 가볍다. 그러니 연비는 더더욱 비교가 안된다. 

 

3열 시트에 앉다보니 서스펜션의 움직임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다소 딱딱한 서스펜션 때문인지 승차감이 그리 편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운전자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은 구성은 없겠다. 경량화 외에도 저중심 설계에 많은 공을 들였고, 서스펜션 세팅도 여느 미니밴 답지 않다. 코너에서의 기민함이나 날렵함은 마치 잘 다듬어진 소형차 같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시트로엥이 마땅한 고성능차를 내놓지 않아서 그렇지, 당장이라도 뛰어난 성능의 엔진을 견딜 차는 많다. 차체의 강성이나 섀시의 완성도는 대부분 엔진 한계치보다 높다. 덕분에 운전의 난이도는 쉽고, 의외의 움직임에 새삼 놀랄 때도 많다. 그랜드 C4 피카소도 마찬가지다. 일본 미니밴의 수치상 성능은 높지만 핸들링에서는 이 차를 따라올 수 없다. 묵직하고 그립감이 뛰어난 스티어링휠을 마구 돌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서해대교에 들어서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운전사나 짐꾼이나 나 못지 않은 흑심을 품고 이번 캠핑에 참가했다. 그들의 마음도 급해졌다. 운전사는 속도를 높였다. 격하게 패들시프트를 조작하는 소리가 3열까지 들리는 듯 했다.

 

12인치 HD 디스플레이를 통해 우리는 모두 이 차의 속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숫자는 계속 상승했다. 다행히 당진을 조금 지나니 비가 잦아들었다. 운전사는 방심할 수 없다는 듯이 속도를 높였다. 그녀들은 기겁할 정도로 속도가 높아졌음에도 평화롭기만 하다. 고속주행의 불안감이 아주 미미했다. 그녀들끼리 쉴새없이 대화를 주고 받는 통에 속도를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고속주행서도 뒷좌석은 소음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난 그녀들의 대화를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 순조롭게 진행된 캠핑, 모든 것은 계획대로?

비가 오다 해가 뜨기를 반복. 우리는 큰 문제없이 안면도에 도착했다. 궂은 날씨 탓인지 캠핑장은 한산했다. 넓은 솔밭이 전부 우리 차지라는 생각을 하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조금 젖은 땅을 잘 다진 후 서둘러 텐트를 쳤다. 타프를 치려고 했는데 프레임이 부족했다. 급한대로 그랜드 C4 피카소의 트렁크를 열고 천막을 연결했다. 또 뒷좌석 시트를 모두 접고 그 평평한 공간도 활용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3열 시트는 등받이에 달린 끈을 당기면 손쉽게 접거나 펼 수 있다. 접힌 시트는 밑공간으로 모습을 감춘다.

 

마치 화물차처럼 넓은 공간이 생겼다. 굳이 텐트가 필요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모로 활용성이 높은 차다. 아마 오늘 좋은 성과를 얻는다면 그 일등공신은 당연히 그랜드 C4 피카소다. 

 

베이스캠프를 완성한 후 우리는 바다로 향했다. 아쉽게 물이 많이 밀려나간 상황이었지만 밀물에만 노 저으란 법은 없다. 일부러 일행과 거리를 두며 그녀와 해변을 걸었다. 굳이 많은 말이 필요없었다. 해변에 찍힌 발자국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툼한 목살이 그릴 위에서 익어갔고 몰래 준비했던 고구마와 감자, 쿠킹호일을 꺼냈다. 호감을 얻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는 조금씩 저물고 있었고, 작은 조명과 화로의 불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어둠이 드리운 캠핑장에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대화가 끊길 때면 아득하게 파도소리가 빈공간을 채웠다. 잦은 눈맞춤이 연속됐다. 이미 우리는 서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고 있었다. 

 

◆ 썸녀와 단둘이 남게되다

돌아오는 길. 계획대로 모두를 내려주고 썸녀와 단둘만 차에 남았다. 피곤해 보여 다리를 펴게 끔 풋레스트를 올려주고 헤드레스트를 구부렸다. 몸을 간지럽히는 마사지 기능도 실행시켰다. 보통의 미니밴은 2열 시트가 가장 편한 구조를 갖는데 반해 그랜드 C4 피카소는 1열 보조석의 편의성이 가장 높다. 

 

야속하게 교통 상황은 좋았고, 너무 빨리 썸녀 집에 도착했다. 짐을 내려주고 마지막 말을 건네야 하는데,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냥 쿨하게 인사만 하고 보내줄까 생각하던 차에 대뜸 썸녀가 “이 차는 얼마야?”라고 물었다. 너무 예상 밖의 질문이다. 썸녀는 심지어 면허도 없는데 차에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 여럿이 계속 놀러다니면 좋겠다"란 말을 남기고 그녀는 집으로 들어갔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계속 놀러다니자'란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고, '여럿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몇일 뒤 단둘이 캠핑을 가자는 제안을 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 당했고, 미지근한 관계는 오히려 살얼음판처럼 차가워졌다. 캠핑을 떠나기 좋은 계절, 다시금 시트로엥 그랜드 C4 피카소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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