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MG] 포드에서 펜타곤까지…‘21세기 맥나마라를 찾아라’
  • 박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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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9.07 17:38
[주말의 MG] 포드에서 펜타곤까지…‘21세기 맥나마라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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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포드가 어렵다. 주가는 폭락했고, 18조원 규모 대출을 신청할 정도로 현금 흐름도 악화됐다. 적자 규모는 2조원을 넘어선 가운데, 대규모 구조조정까지 이뤄지고 있다. 회사 안팎에서 ‘21세기 맥나마라’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로버트 스트레인지 맥나마라는 ‘과학적 관리와 효율’을 앞세워 1950년대 포드의 체질 개선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의 경영 방식은 포드뿐 아니라 경쟁사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미국 빅3의 기틀이 된다. 맥나마라를 포드가(家) 외 최초로 사장 자리에 올라섰다.

로버트 스트레인지 맥나마라 (사진= 美 국방부 아카이브)
로버트 스트레인지 맥나마라 (사진= 美 국방부 아카이브)

맥나마라는 1937년 UC버클리를 졸업하고 하버드 MBA를 거쳐 하버드 역사상 최연소 조교수에 오른다, 당시 그는 조교수 가운데 가장 많은 연봉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미 육군 장교를 대상으로 경영학 분석 기법과 통계를 강의했다. 

다만 하버드 재직 기간은 길지 않았다. 미 육군성에서 장교 임관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맥나마라는 3년 만에 하버드 조교수 직을 사임하고, 미 육군 항공대 대위로 입대한다.

맥나마라는 폭격기 편대 공격 빈도를 분석하고, 명중률과 폭탄 투하 효율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그는 미 육군성에 B-29 폭격기 증산을 요구했고, 이는 차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열도에 대한 무차별 폭격 전략으로 이어진다. 맥나마라는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비전투 병과 장교로서 드물게 공로 훈장을 받는다.

10명의 ‘데이터 위즈키즈’, 오른쪽 두 번째가 맥나마라(사진=미국 자동차 명예의전당)
10명의 ‘데이터 위즈키즈’, 오른쪽 두 번째가 맥나마라(사진=미국 자동차 명예의전당)

1946년 전역한 맥나마라는 헨리 포드 2세의 부름을 받고, 포드 재무기획 담당자로 입사한다. 포드는 당시 맥나마라와 함께 근무하던 통계장교 10명을 채용했고, 이들은 ‘데이터 위즈키즈’라고 불리며 포드의 체질 개선 전반을 주도한다.

맥나마라는 조직 관리 시스템을 개혁하고, 생산 부문에 ‘과학적 관리’를 강조했다. 당시 익숙치 않던 컴퓨터를 사내에 보급했고, 포드의 모든 생산 관리 시스템을 컴퓨터 기반 운영으로 전환시켰다. 이 같은 결정은 북미 자동차 산업의 생산 관리 체계를 전산화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포드 안전 개념을 정립한 것도 맥나마라다. 1955년 자체 충돌 테스트를 시작하고, 같은 해 안전 사양을 묶은 ‘라이프 가드’ 패키지를 선보였다. 여기에는 어린이 보호용 2열 도어 잠금 장치, 비산방지 유리 등이 포함됐고 미국 자동차 업계 최초로 전 차량에 2점식 안전벨트를 옵션으로 제공했다.

로버트 맥나마라와 헨리 포드 2세 (사진=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로버트 맥나마라와 헨리 포드 2세 (사진=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1960년대 포드 최고 히트 모델 팔콘도 기획했다. 당시 급성장하는 세컨드카 시장을 겨냥해 소형차를 개발했고, 생산 효율성이 뛰어난 유니바디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맥나마라는 이 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입사 14년 만인 1960년, 포드가(家) 외 최초로 사장 자리에 오른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밥 루츠나 리 아이아코카보다 자동차 업계 재직 경력은 짧았지만, 굵직한 업적으로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사진=백악관 아카이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사진=백악관 아카이브)

사실 맥나마라는 전 세계 ‘밀덕’들 사이에서 더 유명하다. 존 F. 케네디와 린든 존슨 행정부에서 7년 간 국방장관으로 재직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방장관임에도 케네디 행정부의 경제 정책 자문까지 겸했다. 베트남 전쟁을 이끌고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극복하는 등 미국 안보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펜타곤 내부 개혁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무기 개발과 체계를 일원화하고, 군내 인종 차별 문제와 부처 간 내부 갈등을 해결하는 데 노력했다. 그는 현대식 미군을 있게 한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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