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반 세기 역사로 다듬어진 브리티시 럭셔리
  • 권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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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8.10 09:00
[시승기]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반 세기 역사로 다듬어진 브리티시 럭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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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랜드로버
사진=랜드로버

과거 SUV는 거칠고 딱딱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랜드로버는 달랐다. 브랜드 기함 레인지로버는 1970년 세계 최초로 ‘럭셔리 SUV’ 콘셉트를 제시하며 등장했다. 탁월한 오프로드 성능은 물론, 고급 세단의 승차감과 상품성까지 동시에 갖췄다. ‘사막의 롤스로이스’로 불린 레인지로버는 전 세계 170만대 이상 누적 판매 기록을 달성하며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50년의 기술적 숙성을 거친 레인지로버는 어떨까. 랜드로버 플래그십 라인업 중 최상위 모델인 ‘레인지로버 5.0SC 오토바이오그래피 LWB’를 만나봤다.

4세대 레인지로버는 등장한지 7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세련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각 헤드램프와 클램쉘 보닛, 스플릿 테일게이트, 웨이스트 라인 등이 고유 실루엣을 구성한다. 이 같은 레인지로버만의 특징은 1994년 출시된 2세대부터 이어지고 있다.

레인지로버는 랜드로버 특유의 유행을 타지 않는 타임리스(Timeless) 디자인 철학을 반 세기동안 반영해왔다. 단순히 느긋한 것이 아닌 꾸준한 업데이트를 통해 최상위 상품성을 유지해왔다.

길이 5200mm, 너비 1985mm, 높이 1840mm의 거대한 덩치는 멀리서 봐도 돋보인다. 21인치 대형 휠이 적용됐지만, 워낙 큰 차체에 맞물리면서 오히려 다소 작게 보이는 듯하다.

부분변경을 거쳤음에도 전반적인 외관 디자인은 이전 모델과 큰 차이가 없다. 영국 귀족에게 급진적 변화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독특한 형상의 사이드벤트 디자인은 다른 차량에서 볼 수 없는 레인지로버만의 상징이다. 물고기 아가미를 닮은 듯한 벤트 그래픽으로부터 출발한 사이드 몰딩은 테일램프까지 이어져 보다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지붕이 떠있는 듯한 ‘플로팅 루프’ 디자인은 밝은 색상의 차량에서는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 날렵한 이미지를 주는 반면, 시승차처럼 어두운 산토리니 블랙 컬러는 거대한 덩치를 한층 더 부각시키는 효과를 만든다. 색상 차이만으로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도어 캐처를 당길 때 나는 ‘철컥’ 소리는 흡사 기계 장치에 올라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대로, 도어를 닫을때 전해지는 육중한 느낌은 사뭇 고급스럽다. 경첩이 물리면 자동으로 도어가 닫히는 소프트 클로징 기능은 기본이다. 실내에 들어서면 차량을 감싸는 정적에 놀랍다. 문을 꼭 닫은 것만으로도 우수한 방음이 절로 느껴진다.

인테리어는 호화롭다. 손 닿는 거의 모든 곳에 천연가죽과 우드 소재가 아낌없이 적용됐다. 카매트 주변부와 천정에 달린 손잡이 등 생각하지 못한 의외의 곳에도 가죽을 둘렀다. 천정은 부드러운 스웨이드 재질로 마감됐다. 

시동을 걸면 스르륵 올라오는 기어노브는 고급스러움이 떨어지는 유일한 곳이다. 다른 차량과 동일한 부품을 사용하는 탓이다
시동을 걸면 스르륵 올라오는 기어노브는 고급스러움이 떨어지는 유일한 곳이다. 다른 차량과 동일한 부품을 사용하는 탓이다

중앙에 위치한 두 개의 디스플레이는 다양한 소재와 어울려 마치 고급스런 가구와 같다. 열선·통풍시트부터 실내 온도 조절, 차체 높이 조절과 주행모드 변경 등 터치 패널을 통해 간단히 조작할 수 있다. 상단 모니터 반응속도가 스마트폰처럼 즉각적이지 않고 한 박자 느린 점은 다소 아쉽다.

실내에 머물고 있으니 진한 가죽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백화점 명품관에서나 맡을 법한 향이다. 청각·시각·촉각에 이어 후각까지 다양한 감각을 만족시킨다. 진정한 럭셔리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감동은 뒷좌석에서 배가된다. 롱 휠베이스 모델다운 광활한 2열 공간을 갖췄다. 고급스러울뿐 아니라 대부분 기능이 간단한 버튼 조작으로 작동하는 편의성까지 겸비했다. 센터콘솔부터 컵홀더, 좌우측 선블라인드까지 모두 전동이다. 뒷좌석도 열선·통풍 기능은 물론 마사지 시트까지 마련됐다.

화룡점정은 바로 보조석 뒷좌석이다. 1등석을 연상케하는 ‘상석’은 럭셔리 SUV의 진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조수석 의자를 최대한 앞으로 밀면 다리를 쭉 뻗고도 남는 공간이 펼쳐진다.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레인지로버는 5인승이다. 2열 가운데 좌석은 좁진 않지만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사실상 4인승으로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

대형 SUV인 만큼, 여유있는 트렁크 공간은 기본이다. 트렁크 용량만 694리터이며, 2열 폴딩시 최대 1908리터까지 늘어난다. 많은 짐을 넣기에는 편하지만, 호화스런 2열 시트는 풀 플랫을 지원하지 않는다.

레인지로버 롱 휠베이스의 공차중량은 2680kg이다. 경쟁 모델인 벤틀리 벤테이가보다 200kg 이상 나가며, 진짜 ‘사막의 롤스로이스’인 컬리넌보다도 무겁다. 수 많은 호화장비들을 싣고 다니는 대가다.

그럼에도 빠른 움직임을 보여준다. 정지상태에서 100km/h 도달 시간은 5.4초다. 수치상으로는 엄청나게 무거운데, 밟는 만큼 나간다. 무거운 차체를 이겨내는 강력한 심장 덕이다. V8 슈퍼차저 엔진은 최고출력 525마력, 최대토크 63.8kgf·m를 발휘하는 괴물이다. 2.6톤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다룬다.

괴물의 울음 소리는 꽤 절제된 느낌이다. 두꺼운 방음벽 덕분에 마치 멀리서 포효하는 듯하다. 간간히 들려오는 슈퍼차저의 하이톤 소리는 8기통 바리톤 음색과 어울려 한층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출력에 대한 만족은 승차감으로 이어진다. 늘 다니던 출근길을 달리니 느낌이 색다르다. 에어 서스펜션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린 세팅이다. 이제는 다소 진부한 표현이지만, ‘구름 위를 떠다닌다’는 말이 머릿속에 절로 떠오른다. 거친 노면을 잘 깔린 아스팔트로 착각하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물론, 이 강력한 성능은 극악의 연비로 돌아왔다. 고속 크루징에서도 연비는 한 자릿수다. 아무리 경제 운전을 시도해도 평균 8.5km/l를 넘기 어렵다. 낮은 연비를 염두해서일까. 연료 탱크 용량은 무려 104리터에 달한다. 고급유를 가득 채울 생각에 아찔하지만, 레인지로버 오너에게는 주유소를 자주 가지 않아도 되는 장점 요소다.

실내 정숙함은 도심은 물론, 고속도로에서도 이어진다. 다소 각진 전면 유리와 거대한 사이드미러는 공기역학성능에 반하지만, 의외로 풍절음은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두꺼운 이중접합유리와 두터운 흡·차음재들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무거운 몸무게와 껑충한 키로 인해 고속 코너링에서는 다소 부담스럽다. 넘치는 힘은 때와 장소를 가려 사용할 필요가 있다.

SUV 명가 출신답게 각종 험로 보조 장치와 더불어 7가지 주행 모드를 지원한다. 아울러 도심형 SUV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저단 기어까지 적용됐다. 랜드로버는 값비싼 레인지로버를 가지고 진흙탕을 헤쳐나갈 이를 위해 브랜드가 가진 오프로드 기술을 모두 집어넣었다.

2020년형 랜드로버 레인지로버는 엔진 및 사양에 따라 총 7가지 트림으로 판매된다. 가격은 스탠다드 휠베이스(SWB) 1억9080만원~2억2480만원, 롱 휠베이스(LWB) 2억2300만원~2억4310만원 등이다.

시승차는 최상위 트림인 5.0SC 오토바이오그래피로 2억4310만원이다. 여기에 엔진 출력과 뒷좌석 사양을 한층 강화한 특별 모델 SV바이오그래피(3억1270만원)가 있다. 재규어랜드로버그룹 내 특별주문 부서인 SVO의 손길이 닿았다.

다양한 브랜드들이 연이어 럭셔리 SUV를 선보이고 있지만,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레인지로버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는 아직 부족한 모습이다. 시간이 흐르고 경쟁자들도 빠르게 따라오겠지만, 레인지로버 역시 쉽게 그 왕좌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랜드로버는 반 세기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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