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소형 SUV 시장의 역사(2)…“여긴 지옥이에요. 각자 알아서 살아남자고요”
  • 전승용
  • 좋아요 0
  • 승인 2020.03.09 10:06
국내 소형 SUV 시장의 역사(2)…“여긴 지옥이에요. 각자 알아서 살아남자고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실, 현대기아차는 그동안 티볼리급 SUV 시장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해외에서는 ix25 등 몇몇 모델을 판매하기도 했지만, 국내에서는 이들보다 한 단계 윗급인 투싼과 스포티지가 워낙 잘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특히, 1.7 디젤 모델의 경우, 트랙스·QM3·티볼리 고급 모델보다 상품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이들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나 싶네요.

7종이 경쟁하는 소형 SUV 시장에 트레일블레이저와 XM3가 합류했다.
7종이 경쟁하는 소형 SUV 시장에 트레일블레이저와 XM3가 합류했다

생각해보면 티볼리가 인기여도 국내 시장 규모가 그리 큰 것은 아니었죠. 이 인기가 신차 효과에 불과한지 아닌지,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등도 확실하지 않았고요. 특히, 신차를 출시하더라도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투싼과 스포티지 등 기존 SUV뿐 아니라 모닝과 엑센트, 아반떼 등의 세단들과 카니발리제이션(같은 편끼리 서로 잡아먹는 자기 잠식)이 일어나는건 아닌지 걱정돼 조금 보수적으로 기다린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초소형 SUV 시장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빨랐습니다. 티볼리의 인기가 2년 넘게 계속되면서 경차와 소형차, 준중형차, 준중형 SUV 시장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죠. 현대차와 기아차는 동시에 B세그먼트 SUV를 내놨습니다. 눈엣가시 같은 티볼리를 잡으려고 말이에요. 

2016, 2017, 2018년 상반기 소형 SUV 판매량 비교표

현대기아차는 당초 예정보다 일정을 앞당겨 2017년 6월과 7월, 각각 코나와 스토닉을 출시했습니다. 이 두 모델은 같은 세그먼트지만 완전히 다른 차입니다. 스토닉은 B세그먼트 SUV 중에서도 완전 엔트리급, 코나는 최고급 B세그먼트 SUV를 목표로 나왔죠. 당연히 탑재된 파워트레인과 첨단 안전-편의 사양이 다릅니다. 서로 상품성이 겹치지 않게 다른 차로 만들어 놓은 것이죠. 이 부분은 다른 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스토닉과 코나는 티볼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현대기아의 신차가 나오면 꺾일 것이라고 예상됐던 티볼리는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코나는 티볼리와 엎치락뒤치락 하며 1위 경쟁을 벌이는데 그쳤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코나의 우세로 바뀌었지만, 이는 티볼리에 없는 전기차 모델이 전체 판매량의 20~30%가량을 보태준 덕분으로 보입니다. 뭐, 티볼리도 롱바디 모델인 에어가 있긴 하지만, 저조한 판매량에 작년 7월 생산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2018년 상반기 소형 SUV 판매량 비교표

스토닉은 아예 티볼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출시 전 스토닉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티볼리 킬러'가 될 것으로 예상되기도 했으나, 이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죠. 실제로 스토닉 디젤의 가격은 트림에 따라 1895~2295만원으로, 엔트리 기준으로 티볼리(2060만원)보다 150만원가량 저렴했거든요.  예상보다 훨씬 저조한 실적에 실망한 기아차는 스토닉 엔진 라인업에서 1.6 디젤을 빼고 1.0 가솔린 터보를 추가했으나, 판매량은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습니다.

‘타도 티볼리'가 생각보다 쉽지 않자, 현대기아는 작년 B세그먼트 SUV에 새로운 모델 2종을 추가했습니다. 이번에도 두 모델을 동시에 내보냈는데요. 2019년 7월에 출시된 바로 베뉴와 셀토스입니다. 물론, 스토닉과 코나처럼 이 둘은 전혀 다른 차입니다. 

베뉴는 CUV 스타일의 스토닉과 달리 정통 SUV 느낌에 더 충실했습니다. ‘혼족을 위한 SUV’라는 마케팅 슬로건이 와닿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스토닉의 실패를 교훈 삼은 새로운 콘셉트를 내세워 꾸준한 판매량을 기록했습니다. 작년 7월 출시 이후 총 1만6867대, 월평균 2812대가 판매됐으니까요. 같은 기간 스토닉이 2721대, 월평균 454대 팔았으니 6배 넘게 많이 팔았네요. 신차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스토닉 첫 출시 6개월 판매량이 9133대, 월평균 1523대임을 고려해도 2배가량 좋은 성적입니다.

자.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셀토스가 범인입니다. 지금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랑 르노삼성 XM3가 차급을 낮추고 꾸역꾸역 B세그먼트 SUV에 들어오려고 하는 이유는 셀토스 때문입니다. 셀토스가 세그먼트를 파괴하지 않았어도, 아니 이렇게 잘 팔리지만 않았어도 트레일블레이저와 XM3는 C세그먼트 SUV로 방향을 틀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셀토스의 크기는 길이가 4375mm로, 한 체급 위인 스포티지보다 겨우 105mm 차이가 납니다. 휠베이스 차이는 더 짧죠. 셀토스의 휠베이스는 2630mm로, 2670mm인 스포티지와 40mm 차이가 납니다. 가장 작은 베뉴(길이 4040mm, 휠베이스 2520mm)와 비교해보면 엄청난 차이입니다. 베뉴와 셀토스가 같은 세그먼트에 있는게 이상할 정도죠. 이 차는 B세그먼트 SUV가 아니라 C세그먼트 SUV로 올려도 된다는 겁니다.

게다가 셀토스에는 세그먼트를 초월할 정도의 엄청난 첨단 안전·편의 사양이 잔뜩 들어갔습니다. 파워트레인도 동급에서는 가장 강력하고요. 코나가 작고 다부진 ‘고급’을 원했다면, 셀토스는 크고 넉넉한 ‘고급'을 원했죠. 

2019년 8월 국산차 판매량

판매량도 엄청납니다. 티볼리와 코나도 못 밟아본 월 6000대 판매를 너무도 쉽게 넘겨버렸습니다. 7월에 출시된 이후 8월과 9월, 11월에 6000대를 넘겼으니 말 다 했죠. 작년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6개월 판매량은 총 3만2174대, 월평균 5363대 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셀토스의 등장으로 국내 소형 SUV 시장의 볼륨은 1만7000대 수준으로 늘어났습니다. 최근에 신차 2종이 추가됐으니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겠죠. 

결과적으로 4종의 모델을 앞세운 현대기아차의 ‘타도 티볼리’는 성공했습니다. 스토닉과 코나에 이어 베뉴와 셀토스까지 출시되자 티볼리 판매량은 월평균 2220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출시전 월평균 3440대에서 1220대가 줄어든 것이죠.

2019년 티볼리, 베뉴, 셀토스 판매량 변화

물론, 롱바디 에어 모델이 단종된 이유도 있겠지만, 충격적인 것은 티볼리가 베뉴와 셀토스 출시 한 달 전인 2019년 6월에 실내외 디자인을 개선하고 상품성을 향상시킨 페이스리프트 모델을 내놨다는 겁니다. 신모델이 나오기 전 6개월 판매량보다, 신모델이 나오고 6개월 판매량이 1220대나 감소했다는 것이죠. 쌍용차 입장에서는 무척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현대기아차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티볼리가 줄어든 자리에는 새로운, 그리고 막강한 경쟁자가 등장했기 때문이죠. 앞서 말씀 드린대로 트레일블레이저와 XM3가 B세그먼트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현대기아차가 그랬던 것처럼 ‘타도 셀토스’죠. 차급으로는 C세그먼트에 들어가도 충분한데, 이쪽이 더 잘 되는 시장이니 옮긴 것이죠.  

속으로는 C세그먼트 막내보다는 B세그먼트 큰형이 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겁니다. 올해 투싼과 스포티지가 풀체인지될 예정인데, 99.97%의 확률로 이들의 덩치가 커질게 분명하거든요. 어차피 강제로 반등급 낮은 차로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으니, 욕심내지 말고 B세그먼트로 가자고 말이에요.

참고로 트레일블레이저의 크기는 길이 4410mm, 휠베이스 2640mm로 셀토스보다 조금 더 큽니다. 전체적인 느낌도 셀토스보다는 투싼에 가깝고요. XM3는 더 황당한 스펙이죠. 길이는 4570mm, 휠베이스는 2720mm로, B세그먼트에 가기는 다소 억지스러운 크기입니다. 투싼이나 스포티지보다 더 크거든요. 

셀토스와 트레일블레이저, XM3의 주요 제원 및 사양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잘되는 곳에서 경쟁해야 조금이라도 더 잘 팔리니까요. 과감한, 또는 무리한 승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뭐 나름대로의 자신감이 없었다면 실행하지 않았겠죠. 덕분에 이들은 기존 B세그먼트 SUV 모델들과 겨룰 경쟁력을 갖추고 나왔습니다. 물론, 이 경쟁력에는 가격이 필수죠. 실제로 이 두 모델은 출시 이후에 가격 대비 성능·사양이 좋다고 엄청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국내 브랜드의 B세그먼트 SUV 역사를 대략 살펴봤습니다. 트랙스, QM3, 티볼리, 코나, 스토닉, 베뉴, 셀토스, 트레일블레이저, XM3… 어휴 이름만 불러도 힘이 들 정도로 많은 차종이 경쟁하는데요. 과연 어떤 모델들이 최후까지 살아남을지 궁금하네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