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 칼럼] ‘폭스바겐의 지배자’가 선택한 두 남자, 그리고 그들의 배신
  • 독일 프랑크푸르트=이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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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12 14:00
[이완 칼럼] ‘폭스바겐의 지배자’가 선택한 두 남자, 그리고 그들의 배신
  • 독일 프랑크푸르트=이완 특파원 (w.lee@motorgrap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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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1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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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5일, 폭스바겐 그룹 회장이자 감독 위원회 의장이었던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ëch, 82)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동차 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던 그의 죽음은 독일 자동차 역사의 한 챕터가 막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죠. 개인적으로 독일 자동차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 포르쉐, 그리고 칼 벤츠와 고트리프 다임러 다음으로 많이 언급을 했던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를 빼놓고 독일 자동차 산업과 역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페르디난트 피에히 / 사진=폭스바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였던 그는 기계공학을 전공한 뛰어난 엔지니어였습니다. 장차 포르쉐를 이끌어갈 재목이었지만 탁월한 능력만큼 고집도 세고 독단적인 면도 있었죠. 포르쉐 후손들이 경영에서 손을 떼고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가게 된 결정적 계기도 바로 피에히 때문이었는데요. 최고의 스포츠카 브랜드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1960년대 후반 917이라는 괴물 같은 레이싱 카를 개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감당하기 쉽지 않은 개발 비용으로 당시 포르쉐를 이끌던 페리 포르쉐로부터 ‘미친 짓을 했다.’는 질책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친가와 외가 자손들 사이의 경쟁으로 긴장 관계에 있던 집안은 이 문제가 직접적 계기가 돼 경영에서는 모두 손을 떼게 됩니다.

1969년 제네바모터쇼에서 917과 함께 서 있는 피에히(오른쪽) / 사진=포르쉐

포르쉐를 쫓겨나듯 떠난 피에히는 이후 아우디에서 콰트로, 알루미늄 바디, TDI 엔진, 공기 역학 등의 탁월한 기술적 결과물을 내었고 결국 회장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이기도 했던 폭스바겐 그룹을 이끌게 되죠.  그는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감독 위원회 의장으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며 폭스바겐 그룹의 절대자로 군림합니다.

적자투성이던 그룹은 흑자로 전환했고, 과감하게 부가티와 같은 브랜드를 인수해 수퍼카 만들기에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아우토슈타트와 드레스덴 유리공장도 그가 만든 수많은 결과물 중 하나였습니다. 피에히가 있는 동안 폭스바겐 그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그룹이 되었고, 판매량에서도 토요타와 경쟁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인맥도 대단했던 그였는데요. 그중 특히 벤델린 비데킹과 마틴 빈터코른과의 관계는 현실이 얼마나 냉혹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 모두가 반대했던 비테킹을 선택하다

벤델린 비데킹은 무너지던 포르쉐를 살린 경영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아니었다면 비데킹은 회장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고, 포르쉐는 계속 힘든 길을 가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급격한 수익성 악화로 포르쉐는 할 수 있는 건 다해야 했습니다.

공장을 놀릴 수 없었기에 다임러 벤츠로부터 생산을 위탁받기도 했고, 또 당시 아우디 회장이었던 피에히의 도움으로 아우디 RS2의 생산을 추펜하우젠 포르쉐 공장에서 하기도 했죠. 하지만 위기를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 자동차 회사가 먹잇감을 노리듯 포르쉐가 매각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피에히는 생산 파트를 총괄했던 벤델린 비데킹 이사를 새로운 포르쉐의 회장 후보로 제안합니다. 피에히 가문의 이런 결정에 처음에는 친가 쪽 포르쉐 가문에서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재무에 밝은 연륜 있는 경영자를 원했던 겁니다. 하지만 피에히는 포르쉐 구조를 개혁하고 생산성을 끌어 올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볼프강 포르쉐 (사진 왼쪽)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벤델린 비데킹(가운데)의 2008년 모습 / 사진=포르쉐

이런 방향성에 벤델린 비데킹만 한 인물이 없다고 본 것이죠. 결국 비데킹은 나이 마흔에 위기의 스포츠카 브랜드를 이끌게 됩니다. 그가 회장에 오르기 전부터 돈 탈탈 털어 추진했던 박스터 개발로 포르쉐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비데킹의 주도로 카이엔이라는 SUV를 생산하게 됩니다. 스포츠카 브랜드에서 SUV를 내놓는다는 것을 이종교배쯤으로 여긴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결국 카이엔은 대박을 터트렸고, 죽어가던 포르쉐는 완전히 되살아났습니다.

피에히의 선택이 옳았음을 비데킹이 제대로 보여준 것이죠. 하지만 세상일 알 수 없다고, 엄청난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비데킹은 포르쉐와 폭스바겐의 긴밀한 관계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도록 아예 하나의 회사로 합칠 계획을 하고 이를 실행합니다. 폭스바겐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당시 폭스바겐의 회장은 비데킹을 회장의 자리에 앉힌 페르디난트 피에히였습니다. 거대한 야망 앞에 두 사람은 적으로 돌아섰고, 노련한 피에히의 전략 앞에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이던 비데킹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맙니다.

# 신뢰하던 빈터코른의 역공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비데킹 이후 다시 한번 자신이 선택한 남자와 권력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던 그는 자신처럼 자동차에 대한 이해도가 있으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금속학 전공에 막스 플랑크 연구소 출신의 마틴 빈터코른은 피에히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갖춘 인물이었죠.

아우디에 입사한 그는 처음부터 품질 관리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폭스바겐으로 옮긴 그는 품질 부분에서 계속 좋은 성과를 내면서 피에히의 눈에 들었고, 결국 2002년 아우디 회장으로, 그리고 다시 2007년에는 폭스바겐 그룹을 이끄는 회장 자리에까지 오릅니다. 피에히의 선택, 그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죠.

마틴 빈터코른(가운데) / 사진=아우디

그런 피에히의 오른팔처럼 마틴 빈터코른은 일했습니다. 폭스바겐 그룹의 회장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뽐냈지만 피에히 앞에서는 순한 양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그 구체적 내용은 비밀처럼 가려져 있지만 피에히는 마틴 빈터코른에 확신을 갖지 못했고, 결국 그를 자리에서 내치는 결정을 합니다.

하지만 빈터코른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독 위원회 다른 멤버들과 힘을 합쳐 피에히를 권좌에서 밀어내고 말죠. 아내이자 이사였던 우르줄라와 함께 독일 자동차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오스트리아 한적한 곳으로 짐을 싸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빈터코른의 기쁨도 잠시, 곧바로 터진 디젤 게이트로 인해 그는 완전히 추락했고, 수백억 대 재산가에서 빈털터리가 될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습니다.

폭스바겐그룹의 지배자였던 피에히 / 사진=폭스바겐

이처럼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들과 권좌를 놓고 처절한 싸움을 펼쳐야 했는데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피에히가 선택했던 남자들의 뒤에는 피에히의 사촌이자 경쟁자였던 볼프강 포르쉐 (포르쉐 박사의 친손자)가 있었습니다. 포르쉐 후손들이 벌이는 수십 년 지분 싸움을 다룰 기회가 있을 때 볼프강 포르쉐 얘기도 조금 더  자세하게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일 경제를 이끄는 거대한 자동차 산업이지만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산업을 쥐락펴락하던 인물들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죠.  평생 최고의 자리에서, 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그였지만 사람과의 관계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을 다시금 떠올려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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