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지프 랭글러 루비콘…마음이 움직일 때
  • 김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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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2.13 16:15
[시승기] 지프 랭글러 루비콘…마음이 움직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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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움직이면 답이 없다. 전어구이의 냄새가 아무리 고소하다 한들, 집 나간 며느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마음이 사로 잡히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숱한 고통이 따라도 오히려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스스로를 더 세뇌한다. 어긋난 의식이 무의식에 스며들면, 세상의 손가락질에도 행복할 수 있다.

랭글러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언제나 그랬다. 스티어링은 헐렁하고, 포장된 도로 위에서의 움직임은 엉망이다. 연비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금만 빨리 달려도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다. 음악을 틀지 않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운다. 크기에 비해 뒷좌석은 좁고, 투박한 소재나 엉성한 마감도 덤이다. 당장이라도 랭글러의 단점을 백개도 넘게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도로에서 랭글러를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랭글러를 열망한다. 한두가지 장점이 수많은 단점을 몰아낸다. 그렇게 랭글러는 70년 넘게 살았다. 아니, 살아남았다. 척박한 주변 환경 속에서 고대생물처럼 진화했다.

그 변화가 시대의 흐름에 비해 느리게도 느껴지지만, 지층의 단면처럼 명확하게 구분되는 부분은 있다. 11년 만에 세대 바뀐 신형 랭글러는 랭글러 역사에 굵은 선을 그었다고 먼훗날 평가될 게 분명하다.

랭글러를 그저 사각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신형 랭글러는 많은 것이 변했다. 슬쩍 스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날선 모서리는 부드럽게 다듬어졌고, 그동안 랭글러에서 마주할 수 없었던 기교도 발견할 수 있다. 곧게 서 있던 그릴은 허리를 살짝 구부렸고, 세상의 모든 바람과 맞싸우던 윈드실드도 고집을 조금 꺾었다.

그동안 랭글러에게는 동그랗고 누런 할로겐 램프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LED 램프의 발전은 자동차 디자인 변화에 중요한 요소가 됐고, 랭글러도 그 영향권에 들어왔다. 하얗게 빛나는 원형 헤드램프가 낯설기도 하지만, 랭글러가 고인물이라는 생각은 사라지게 만든다.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춘 부분은 또 있다. 랭글러는 공기역학이나, 경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필요없었고, 비슷한 성격을 가진 친구들도 그렇게 여긴다고 방심했을지도 모른다. 프레임 바디를 쓰던 덩치들이 모노코크로 한둘 넘어가는 상황이지만, 랭글러는 프레임 바디를 고수했다. 다만, 뼈대의 설계를 새롭게 했고, 고장력 강판의 사용을 늘렸다. 또 도어, 후드 등을 알루미늄으로 만들면서 무게를 줄였다. 신형 랭글러는 약 90kg 가량 가벼워졌다.

실내의 변화는 압권이다. 공유되는 부품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새로워졌다. 촌스럽고, 투박한 느낌도 찾아보기 힘들다. 누구의 마음을 훔치려 한 것인가. 심지어 고급스럽게 보이려 한 흔적도 있고, 귀여운 부분도 많다. 여전히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부분도 더러 있지만 무엇보다 무심했던 플라스틱 가공이 한결 나아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고속도로를 달리지 않았다면 이런 유쾌한 기분이 지속됐을텐데. 시속 100km를 넘나드는 랭글러 루비콘에게서는 새롭게 바뀐 디자인이나, 아기자기한 예쁜 구석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프로드에 특화된 타이어는 고속도로에서 묘한 소리를 낸다. 카니발의 공명음은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노래를 틀지 않으면, 소음에 시달려야 하고, 노래를 틀면 대화가 안된다. 예상했던 것이지만, 막상 마주하니 당혹스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 의미는 모두 달랐다. 굽이진 도로를 달리면, 여전히 몸이 기우뚱했지만 안간힘을 쓰며 버티려는 모습이 예전과 달라서 기특했다. 스티어링휠을 돌리는 느낌도 일반적인 SUV를 흉내내려 애썼다. 그래서 똑바로 빠르게 달릴 때도 위화감은 크지 않았다. 사각지대 모니터링, 크루즈 컨트롤 등의 기초적인 운전자 보조 시스템은 아쉽다기 보단, 이제 랭글러에도 안전장비가 달리는 시대구나 생각들게 했다. 최근 유로 NCAP에서는 안전장비, 에어백 등이 부족해, 처참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역시 랭글러 루비콘은 아스팔트를 벗어났을 때 가장 빛을 발한다. 온로드에서의 단점은 곧바로 장점이 된다. 높은 시트 포지션, 여유로운 스티어링, 축축 늘어지는 서스펜션, 차체 크기에 비해 좁은 캐빈 등은 랭글러 루비콘이 어떤 곳에서도 위험에 처하지 않게, 또는 위험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정통 오프로더라고 불리는 몇몇 중에서도 랭글러가 가장 지독하고, 원초적이다.

무릎까지 패인 구덩이를 지날 때도 랭글러는 태연하게 앞바퀴를 구덩이로 밀어넣는다. 스웨이바를 분리시키면 마치 가제트 로봇팔처럼 앞바퀴가 쭉 내려온다. 더듬더듬 바닥을 짚는 모습은 언제봐도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접지력을 잃지 않는 것이 우선이고, 바퀴가 헛돌기 시작할 땐 침착하게 디퍼렌셜을 잠그면 된다. 그럼, 내가 원하는대로 구동력을 바퀴에 균일하게 보낼 수 있다. 사람처럼, 자연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랭글러의 장수의 비결일지도 모른다.

종종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확인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SUV를 살 건데 말야, 이거랑 저거랑, 랭글러 중에서 고민이야. 나는 그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 당신 뜻대로 하소서, 이미 다 정해 놓았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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