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포르쉐 718 박스터…자아 정체성의 확립
  • 김상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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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9.20 14:34
[시승기] 포르쉐 718 박스터…자아 정체성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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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는 정말 얄밉고, 영악했다. 신차가 기존보다 좋은거야 당연하지만, 이번엔 정도가 심했다. 신형 718 박스터(코드명 982)의 가장 허약한 모델이 모터그래프의 장기 시승차 박스터 GTS(코드명 981)를 여러 테스트에서 농락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우리는 포르쉐에게 우롱당했다. 

# 유난스러운 포르쉐

포르쉐는 대뜸 올해 1월, 박스터의 이름에 ‘718’을 붙였다. 풀체인지도 아닌 페이스리프트 단계에서 이름이 바뀌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때만 해도 포르쉐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718은 1950년대 포르쉐를 빛낸 레이스카의 이름이다. 718은 자그마한 4기통 수평대향형 엔진을 품고, 유럽 무대를 휩쓸었다. 포르쉐는 이런 유구한 역사를 다시 끄집어 내는 것에 능하다. 역사는 사실이지만 시간을 거슬러오면서 과장되고 부풀려지기도 한다. 또 ‘이건 운명’이라고 현실을 포장하기도 한다. 

718 박스터가 그렇게 보였다. 과거의 영광을 되살렸다는 말은 그저 6기통에서 4기통으로, 자연흡기에서 터보 차저로 자존심을 굽힌 포르쉐의 변명 같이 들렸다. 환경을 생각하는 시대적 요구 때문에 줄곧 내세웠던 포르쉐만의 특성을 내던지고 대신 ‘고성능’이란 달콤한 사탕을 건낸 듯 했다. 

718 박스터는 실린더가 두개 줄었고, 배기량은 약 700cc 낮아졌다. 하지만 터보 차저를 통해 최고출력은 35마력이 늘었고 최대토크는 무려 11.1kg.m나 높아졌다. 심지어 박스터 GTS보다도 최대토크가 높다. 718 박스터 S의 경우 3.8리터 6기통 엔진이 장착된 박스터의 끝판왕 ‘스파이더’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런 급격한 성능 향상 때문에 향후 출시될 718 박스터 GTS나 718 박스터 스파이더의 힘은 짐작하기도 힘들다. 

성능이 높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들의 기대치는 언제나 높다. 하지만, 박스터에게 이렇게 극단적인 고성능이 필요한지는 의문이었다. 작고 가벼운 차체에서 느껴지는 경쾌한 몸놀림과 하늘을 품고 달리는 ‘오픈 에어링’만으로도 박스터는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믿었다. 박스터에 더 강한 엔진이라니, 쓸데 없는 짓 했다는 생각이었다. 

# 터보 엔진과 PDK의 환상 궁합

하지만 포르쉐의 사탕은 너무나 달콤했다. 격정적으로 내달리는 718 박스터는 결점이 없었다. 터보 엔진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911이 그랬던 것처럼 매끄러웠고 PDK 변속기는 더 적극적으로 엔진을 닦달했다. 2.0리터 4기통 터보 엔진이 장착된 718 박스터는 3.6리터 6기통 자연흡기 엔진이 장착된 박스터 GTS에게 단 한번도 추월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철저하게 짓밟았다. 박스터 GTS가 조금 먼저 출발하는 경우에도 718 박스터는 금세 추월해 버렸다.

조금 너무하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718 박스터는 너무 빨랐다. 박스터 GTS가 아니라 911의 영역을 넘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박스터엔 터보 엔진이 처음이기 때문에 터빈의 회전수나 용량을 잘못 계산한 ‘오버 엔지니어링’이 아닐까 하는 억지스런 추측이 들 정도였다. 

성능은 비슷했지만, 가속 성능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 이유는 변속 시점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718 박스터는 엔진회전수를 결코 높게 올리지 않았다. 임의로 조작하지 않는 이상 회전계의 바늘은 레드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높은 회전수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엔진회전수를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최적의 힘을 뽑아내는 영역 안에서만 움직이도록 재빠르게 변속됐으며, 새로운 기어가 맞물리는 순간에도 일말의 주춤거림없이 엔진의 힘을 온전히 뽑아냈다.

토크가 출중한 터보 엔진은 수동으로 조작할 때도 변속 타이밍을 평소보다 앞당기는 편이 가속에 더 유리했다. 이 PDK 변속기는 아주 치밀하게 터보 엔진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반해 박스터 GTS는 엔진회전수가 거의 한계가 달했을 때 변속이 이뤄졌다. 718 박스터에 비해 긴장감은 고조됐지만, 동력 손실도 컸다. 다시 힘을 모으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박스터 GTS의 변속은 718 박스터에 비해 매우 큰 동작처럼 느껴졌다. 718 박스터가 스트레이트를 뻗었다면, 박스터 GTS는 큰 훅을 날리는 기분이었다.

다만, 4기통 엔진의 소리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다. 매우 거칠었지만, 박스터GTS에 비하면 가슴까지 뛰게 하진 못했다. 이에 반해 박스터 GTS는 슈퍼카 부럽지 않은 소리가 났다.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는 순간 스로틀이 닫히면 머플러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 변치 않는 박스터의 밸런스

슬라럼 테스트를 진행하면서 박스터 GTS의 변호를 포기했다. 일년여간 동고동락했던 박스터 GTS에 대한 감정은 연민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동안 박스터 GTS의 예리한 핸들링에 수없이 감탄했지만, 718 박스터와 번갈아 타보니 초라하게 느껴졌다.

차체 크기는 길이가 5mm 늘어났고, 높이가 1mm 낮아진 게 전부다. 무게도 큰 차이가 없다. 서스펜션의 변화도 사실 상 크지 않았다. 전륜과 후륜에는 여전히 맥퍼슨 스트럿이 적용됐다. 다만 일부 부품이 새롭게 설계됐고, 재조정됐다. 그것이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라 포르쉐도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파워 스티어링 시스템의 소프트웨어 개선이 이뤄졌다. 포르쉐는 이미 좋은 것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포르쉐에 따르면 파워 스티어링 시스템의 정확도는 10% 향상됐다. 연속되는 회전 구간에서 718 박스터는 시선을 따라 쉽게 움직였고, 스티어링의 반발력은 시시각각 변했다. 타이어와 노면이 부대끼고 있는 상황을 직접 보지 않아도, 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박스터 GTS는 쫀득한 맛이 덜했다. 평소엔 느끼지 못했던 스티어링의 가벼움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본질적으로 박스터는 균형감각이 뛰어났다. 718 박스터나 박스터 GTS 모두 무게 중심은 한없이 낮았고, 밸런스가 훌륭했다. 억지로 무게 중심을 무너트리려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718 박스터는 포르쉐 액티브 서스펜션 매니지먼트(PASM)를 추가하면 지상고를 10mm 낮출 수 있고, 718 박스터 S는 지상고를 20mm 낮출 수 있다. 차의 무게 중심은 무조건 낮은 것이 좋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다.

브레이크 시스템에 대한 보완도 이뤄졌다. 동일한 4피스톤 알루미늄 모노블록 캘리퍼를 사용하지만, 브레이크 디스트의 크기가 커졌다. 앞바퀴가 기존 12.4인치에서 12.9인치로 커졌고, 더 두꺼워졌다. 

# 진짜 스포츠카가 됐다

718 박스터는 포르쉐의 전설적인 스포츠카 ‘카레라 GT’와 전설이 되고 있는 스포츠카 ‘918 스파이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포르쉐의 최신 디자인 요소까지 담겼다.

윈드 스크린, 소프트탑 등을 제외하고 모든 패널이 새롭게 제작됐다. 덕분에 입체적이고 와일드하게 변했다. 또 세부적인 디자인이 바뀌면서 인상이 확 달라졌다. ‘카레라 GT’와 몹시 흡사한 느낌을 줬다. 헤드램프나 불룩 솟구친 프론트 휀더가 인상적이었다. 뒷모습도 볼륨감이 강조되면서, 박스터의 날카로운 맛이 한층 더 부각됐다. 

그리고 최신 포르쉐임을 말해주는 ‘4-포인트’ LED가 헤드램프와 테일램프에서 밝게 빛났다. 이런 작은 요소가 오너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게 한다.

실내는 소소하지만 꼭 필요한 부분에서 개선이 이뤄졌다. 918 스파이더의 디자인이 반영된 새로운 스티어링휠은 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만족도가 높았다. 특히 터보 부스트를 극대화시키는 ‘스포츠 리스폰스’ 버튼과 주행모드 다이얼이 오른손 부근에 자리잡은 것도 중요한 변화 포인트다. 

형님들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렇게까지 물려받은 박스터는 지금껏 없었다. 사실 포르쉐가 박스터에 718이란 이름을 붙인 것, 폭스바겐 공장에서 일부 생산되던 박스터를 이젠 포르쉐의 본진인 슈투트가르트 공장에서만 생산한다는 것 등은 포르쉐가 박스터를 진짜 스포츠카로 인정한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718 박스터를 통해 박스터의 자아 정체성은 비로소 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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