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 어느 정치인이 남기고 간 낡은 자동차
  • 독일=스케치북, 정리=전승용 기자
  • 좋아요 0
  • 승인 2015.12.08 14:56
[스케치북] 어느 정치인이 남기고 간 낡은 자동차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일에서 스케치북이라는 필명으로 인기리에 스케치북다이어리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완님의 칼럼입니다. 한국인으로서 독일 현지에서 직접 겪는 교통사회의 문제점들과 개선점들, 그리고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과 현지 언론의 흐름에 대해 담백하게 풀어냅니다.

 

금요일 저녁 집으로 배달되는 자동차 잡지를 펴는 순간 기분 좋은 주말이 시작된다. 어떤 신차 소식이 실렸을까, 비교테스트는 어떤 차들로 진행했고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지난주의 이슈들은 무엇이 있었나 등 흥미 넘치는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나라'인 독일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산업을 넘어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화를 공유하고 배우는데 즐거움을 느낀다. 지난주 집으로 배달된 잡지에 이러한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기사가 한 편 담겨 있어 소개해본다. 지난달 10일, 9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독일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의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다.

# 독일인이 사랑했던 정치인

▲ 독일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

1918년 북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헬무트 슈미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유대인 은행가의 사생아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그 사실을 숨기면서 지내왔고, 자연스레 나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성장했다. 20세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징집됐으며,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와 경제와 정치를 함께 공부하며 사민당에 가입했다. 1953년에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이후 함부르크 시의원으로도 활동하며 위기관리능력을 인정받는다. 이때부터 헬무트 슈미트에게는 위기관리인이라는 수사가 따라다니게 된다.

1974년, 동방정책으로 유명한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비서관 간첩혐의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헬무트 슈미트는 5대 독일연방(당시 서독) 총리에 오른다. 특히, 사민당에 대한 이념 공세와 국제 경기 불안, 극단적인 테러 등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1980년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어려운 재정 상태가 발목을 잡았다. 헬무트 슈미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자증세를 시도했고, 이에 친기업 성향인 자유민주당이 거세게 반발하며 두 정당의 연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 등으로 헬무트 슈미트에 대한 불신임안이 통과됐고, 1982년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 1982년 사민당 모임에 참석 당시의 헬무트 슈미트 / 사진=위키피디아, Hoffmann, Harald

# 아는 사람 없던 그의 마지막 자동차

헬무트 슈미트는 퇴임 이후 언론사 공동발행인을 비롯해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 공연을 하는 등 음악인으로 살면서 독일인이 사랑하는 정치인으로 기억됐다. 특히, 유럽연합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2005년 진행된 독일 저명인사들 선호도 조사에서 무려 96%의 지지를 얻으며 최고의 독일인으로 뽑혔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현존하는 가장 현명한 독일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메르켈 총리는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를 일컬어 '그 자체가 독일 정치구조였다'고 말했고, 슈타인마이어 외무부 장관은 '독일인의 아버지상', 또는 '독일의 멘토'라고 칭송했다. 한 정치인이 이념과 정당을 뛰어넘어 모든 독일인들에게 이처럼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합리적이면서 보편적인 정치 여정 때문이란 평가다.

고향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공동묘지에 안장된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는 생활 면에서도 소탈한 편이었다. 그의 첫차는 은행 대출을 받아 구입한 오펠이었는데, 이후로도 자신이 직접 서민들이 주로 애용하던 오펠을 구입했다. 물론, 거의 알려진 바 없는 그의 마지막 자동차 역시 오펠이었다.

▲ 아우토빌트의 헬무트 슈미트 관련 기사 / PDF 캡쳐

헬무트 슈미트의 마지막 차가 오펠이었다는 것은 독일의 유명 자동차 잡지인 아우토빌트에 의해 알려졌다. 아우토빌트는 헬무트 슈미트가 타던 검은색 해치백 모델인 '1991년식 오펠 카데트 GSI'를 직접 몰고 그가 살던 집에서부터 총리로 재직하며 활동하던 본(Bonn)까지 달리며 추억을 되짚었다. 흥미로운 점은 헬무트 슈미트가 이 차를 구입했을 당시 이미 70살이 넘었다는 것인데, 전통적으로 선호하던 세단이 아닌, 당시 젊은이들이 주로 타던 해치백을 구입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오펠 카데트 GSI / 사진=오펠

# 카데트, 대우 르망 바로 그 모델

이 차가 유독 더 반갑게 느껴진 이유는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소개돼 인기를 모은 대우 르망과 같은 차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카데트는 오펠이 개발한 모델로 북미에서는 폰티악에서, 한국에서는 대우자동차에서 판매했다. 우리나라에는 다운사이징 엔진이 장착됐지만, 독일에서는 1.6과 2.0 엔진이 들어갔다. 1톤이 채 안되는 무게에 115마력의 엔진이 장착됐는데, 하체도 비교적 튼튼해 아우토반에서 고속으로 달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 르망 레이서 / 사진=favcars.com

총리 재임 기간에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벤츠 등을 탔지만 그 외에는 평범한 오펠 차들을 탔던 헬무트 슈미트. 이 차는 현재 오펠 클래식카 부서가 보관하고 있는데, 오펠 측은 "자신들의 차를 애용했던 헬무트 슈미트를 기리는 의미에서 앞으로도 잘 관리를 해 나갈 것"이라 전했다.

한 명의 정치인이 살아서는 물론, 사후에도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다는 건 분명 그 개인에게도 행복한 일이다. 총리까지 지낸 인물이 저렴한 오펠 차를 탔다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유명 정치인이 애용했던 자동차를 구입해 잘 보관하고 있는 오펠의 대응 역시 멋있어 보인다. 낡은 자동차 한 대를 통해 정치인을 기념하는 모습, 언젠가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날이 오길 바란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