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이재용 부회장도 구하지 못한 체어맨W, 쌍용차의 계륵
  • 김상영 기자
  • 좋아요 0
  • 승인 2017.02.03 14:31
[기자수첩] 이재용 부회장도 구하지 못한 체어맨W, 쌍용차의 계륵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번에 체어맨W 대박치는거 아닐까요. 단지 우스갯소리로만 건넨 말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립밤’은 되고, 체어맨W은 되지 말란 법은 없었으니깐.

# 이재용과 체어맨

정말 코미디 같은 일이었다. 지난해 12월 진행된 ‘국회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쏠렸다. 증인으로 출석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어눌한 말투나, 똑같은 답변보다 그가 청문회장에서 사용한 립밤이 무엇인지, 얼마인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쏠렸다.

 

‘이재용 립밤’이 각종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랐고 불티나게 팔렸다.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쓰는 제품에 대한 호기심과 그에 대한 ‘동일시’가 맞물렸다. 비단 립밤 뿐만 아니라, 이재용 부회장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이재용 부회장의 재산은 얼마인지, 어디에 사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그리고 지난달, 이재용 부회장은 피의자 신분으로 특검 조사를 받기 위해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 도착했다. 수많은 취재진이 몰렸고, 그가 특검 사무실로 향하는 장면은 생중계됐다. 덕분에 그가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쌍용차 체어맨W도 함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 쌍용차 체어맨W 카이저. 체어맨W는 계속 변화하고 있긴 하다.

체어맨W 역시 ‘이재용의 차’로 다시 한번 이슈가 됐지만, 립밤과 달리 그 관심이 실제 판매로 이어지진 않았다. 지난해 12월에는 100대가 팔렸는데, 지난달에는 63대로 크게 줄었다. 이재용 부회장도 체어맨W를 구하지 못한 셈이다.

# 체어맨에 대한 단상

옆집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살았다. 그는 메르세데스-벤츠를 빼닮았던 1세대 체어맨을 탔다. 우연히도 그 당시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도 체어맨을 끌었다. 그땐 ‘비상하는 새의 날개’를 형상화한 보닛의 엠블럼이 굉장히 위엄있게 느껴졌다.

▲ 메르세데스-벤츠도 놀랐던, 1세대 체어맨. 쌍용차는 E클래스로 S클래스급의 세단을 만들어놓았다. 

등록금 인상 문제로, 총장의 차를 둘러싸고 농성을 벌였을 때도 체어맨이 중심에 있었다. 체어맨은 그 이름처럼 꽤 오랜 시간 가장 높은 위치를 지켰다. 

당시엔 많은 기업인과 공직자들이 체어맨을 탔다. 또 정년을 마치고, 체어맨과 함께 노후 생활을 보내는 것이 성공한 인생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 최초로 생산된 1호 체어맨. 쌍용건설 김석준 회장(우측)은 18년 동안 무려 33만km를 달렸다. 그리고 이 차를 쌍용차에게 기증했고, 신형 체어맨W를 새로 구입했다.

고급 세단 한번 만들어본 적 없는 쌍용차가 내놓은, 처음이자 유일한 세단이었지만, 체어맨에겐 메르세데스-벤츠의 후광이 강력하게 작용했다. 또 쌍용차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도 높았다. 

# 수많았던 위기

하지만 체어맨의 역사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체어맨이 출시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우차는 쌍용차를 인수했고, 곧바로 체어맨에 대우차의 상징인 ‘삼분할 라디에이터 그릴’을 심었다. 볼썽사납게 변한 체어맨은 많은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대우그룹도 IMF 직격탄을 맞았고, 결국 쌍용차를 놓아줬다.

▲ 레간자가 아니다. 삼분할 그릴이 적용됐던 체어맨.

쌍용차는 독립했지만, 경영난은 심각했다. 처음 체어맨을 개발할 때 만큼의 자본을 투자할 수 없었고, 발전은 더디기만 했다. 외환위기로 소비자들의 지갑도 쉽게 열지 않았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대형 세단을 압도하던 체어맨의 이빨이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쌍용차는 저렴한 체어맨과 고급스러운 체어맨으로 체어맨을 분리시켰다. 하지만 이 역시 신통치 않았고, 결국 저렴한 체어맨이었던 체어맨H는 2014년 단종됐다. 

 

홀로 남은 체어맨W도 힘을 잃었다. 판매는 계속 줄었고, 지속적인 개선을 시도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체어맨에 대한 환상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이젠 굳이 명맥을 이어가야 할 이유를 찾는 것도 힘든 상황이 됐다. 

# 죽지 못해 살 바에

쌍용차도 체어맨에 대한 고민이 날로 깊어졌다. 새로 만들 여력도 부족하고, 수입차가 범람한 무한경쟁 시대에서 성공을 확신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그새 트렌드가 변했다. SUV가 대세가 됐다. 체어맨을 두고 고민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쌍용차는 올해 플래그십 SUV인 ‘Y400’을 출시한다. 내년엔 신형 코란도 스포츠를 내놓을 계획이다. 여기까진 마힌드라의 승인까지 받은 상황이다. 그리고 2019년엔 진정한 5세대 코란도C를 출시하고, 2020년엔 신형 코란도 투리스모와 XAV 콘셉트의 양산형 모델을 선보일 예정이다. 

▲ 체어맨W 카이저.

2020년까지 쌍용차의 신차 로드맵에서 체어맨은 빠졌다. 하지만 단종 계획도 없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고 있다. 억지스런 체어맨의 생명 연장이 그나마 남아있던 좋은 이미지마저 갉아먹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재용 부회장이 아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톰 크루즈, 버락 오바마가 탔어도 체어맨을 살리지 못할 것 같다.

결단이 필요하다. 쌍용차가 글로벌 SUV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자존심, 명성은 지금부터 쌓으면 된다. 체어맨의 영광을 지키고, 새로운 시장 진출과 브랜드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체어맨을 놓아주는 것에 대해 더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관련기사